그곳에선 ‘고소영’보다 ‘영구’가 더 인기 있네
이번 인사를 통해 그룹 내 대표적인 호남 출신 최고경영자(CEO)였던 배정충 삼성생명 부회장과 고홍식 삼성석유화학 사장이 옷을 벗은 반면 영남권 인사들이 대거 승진해 대조를 이뤘다. 이 같은 영남권 인사들의 득세는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경남 의령 출신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영남권에서 창업의 기틀을 닦은 터라 전통적으로 삼성그룹 내에선 영남권 색채가 강했다. 아울러 호남 기반 정권도 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동시에 호남 출신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비자금 폭로 여파가 이번 호남 출신 승진 소외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호남 몰락, 영남 부상’으로 대변되는 이번 인사에서 최대 수혜 세력은 대구 출신들로 볼 수 있다. 대구는 지난 1938년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상회’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우선 대표적으로 삼성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김징완 부회장이 대구 현풍고등학교 출신이다. 삼성코닝정밀유리 부사장에서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선 최주현 사장과 삼성전자 부사장에서 디바이스솔루션 부문 LCD사업부장(사장)으로 승진한 장원기 사장은 대구 경북고 선후배 사이다.
삼성전자 부사장에서 삼성벤처투자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선 최외홍 사장과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 부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사장)으로 승진한 윤부근 사장은 대구 대륜고 선후배 사이다.
그 외 삼성토탈 부사장에서 삼성BP화학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한 박오규 사장도 대구상고 출신이다. 대구 지역 고교 출신 인사들 중에서 사장급 이상 승진자 6명이 배출된 것이다. 여기에 삼성 SDS 대표이사 사장에서 삼성네트웍스 대표이사 사장까지 겸직하게 된 김인 사장도 대구고 출신이다.
부산 출신 중에도 사장 승진자가 4명 나왔다. 삼성물산 부사장에서 삼성물산 보좌역 겸 삼성브랜드관리위원장(사장)으로 승진한 장충기 사장과 삼성물산 부사장에서 삼성석유화학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선 윤순봉 사장은 부산고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전략기획실에서 손발을 맞춘 데 이어 지난해 인사에서 나란히 삼성물산 부사장으로 발령받아 ‘전략기획실 부재 상태에서 삼성물산이 그룹의 임시 컨트롤타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삼성증권 부사장에서 에스원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선 서준희 사장과 제일모직 부사장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한 황백 사장은 부산 경남고 졸업 동기다.
영남 출신 신임 사장단이 이번 인사를 통해 삼성그룹 지배구조 주요 포스트에 배치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남겨놓은 박노빈 사장이 상담역으로 물러나면서 신임 삼성에버랜드 사장 자리에 오른 최주현 사장이 눈길을 끈다.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상 삼성에버랜드는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지분 25.10%를 보유, 경영권 승계 첨병 역할을 맡을 회사인 만큼 삼성에버랜드 사장직엔 수뇌부의 신뢰가 두터운 인사가 앉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황백 제일모직 사장의 역할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건희 전 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여동생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로 분가한 것처럼 그동안 이 전 회장의 차녀 이서현 상무가 재직 중인 제일모직의 계열분리 가능성이 줄곧 거론돼왔다. 최근 들어 제일모직에선 삼성맨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임원들이 퇴진하고 외부 영입파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이서현 상무의 남편 김재열 전무가 상무에서 승진하면서 이서현 상무 중심 체제로의 조직재편이 한창이란 관측이 나온다.
비록 승진이 아닌 전보였지만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에서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마산고 출신 최도석 사장도 관심 대상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4·22 삼성쇄신안 발표를 통해 삼성카드가 갖고 있는 삼성에버랜드 지분 25.64%를 2012년까지 매도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로부터 비판받아온 순환출자구조는 해소되겠지만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율이 이재용 전무 지분율보다 높은 만큼 처리과정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최도석 사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이 물러난 삼성에서 최고의 재무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로 그가 내놓을 순환출자구조 해소 묘수가 무엇일지에 시선이 쏠린다. 그가 이학수 전 부회장의 측근으로 꼽혔던 만큼 이 전 부회장의 막후 영향력 행사 여부도 관심거리다.
향후 삼성 지배구조와 승계구도 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영남 출신 신임 사장단에겐 그룹 총수 직할부대로 평가받는 전략기획실(옛 비서실·구조본) 출신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회장 비서실, 구조본, 전략기획실 근무 경력만 10년이 넘는 최주현 사장은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 경영진단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황백 사장은 회장 비서실, 재무팀을 거쳐 전략2팀장(이사)을 역임했다.
회장 비서실에서 구조본 전략기획실을 거치며 기획통으로 잔뼈가 굵은 장충기 사장의 브랜드관리위원장직 입성은 자동차사업 재진출 여부에 세간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외환위기 당시 삼성의 자동차 사업 실패로 이를 주도한 지승림 전 삼성중공업 부사장 계열의 기획팀 인맥이 지고 이학수 전 부회장의 재무팀 라인이 삼성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알려져 왔다. 정부 여당의 ‘삼성의 쌍용차 인수’에 대한 기대가 큰 상황에서 기획분야에서 공력을 쌓아온 장 사장의 부상이 자동차와 연결되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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