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좌까지 밀어준 ‘순풍’이 ‘역풍’될 수도
▲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첫 출근일인 지난 2일 고객사를 방문했다(앞줄 왼쪽부터 최길선 현대중공업 사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오창관 포스코 마케팅 부사장, 이재성 현대중공업 부사장). | ||
‘이구택 시대’를 마감하고 정준양호를 출범시킨 포스코는 지난 2월 27일 이사회를 통해 이동희(재무투자부문장) 최종태(경영지원부문장) 부사장의 대표이사 사장 선임을 비롯한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 최대 관심사였던 윤석만 포스코 사장은 포스코건설 회장으로 추대됐다. 윤석만 신임 회장이 정준양 회장의 포스코 공채 선배인 데다 지난 1월 이구택 전 회장 사의 표명 이후 두 사람이 신임 회장직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점 등을 감안, 포스코건설행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박득표 전 회장 이후 5년 만에 포스코건설 회장직을 부활시킨 데 대해 포스코 측은 “윤석만 회장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밝혔다. 사장에서 회장으로 올라섰으니 적어도 직함상으로는 ‘예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코건설의 경영을 주관하는 대표이사는 정동화 신임 사장의 몫이 됐다. 부사장에서 이번에 승진한 정동화 사장은 정준양 회장보다 1년 늦은 1976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해 설비기술부장, 광양제철소 부소장, 포스코건설 플랜트사업본부장(부사장)을 거쳤다.
정동화 사장은 지난 2004년 광양제철소 부소장으로 부임해 당시 광양제철소장이었던 정준양 회장을 2년간 보좌한 경험이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정준양 회장과 가까운 반면 홍보·마케팅에서 잔뼈가 굵은 윤석만 회장과는 큰 인연이 없다. 게다가 건설 쪽은 윤 회장에겐 익숙지 않은 분야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재계에선 회장 경쟁에서 패한 윤 회장의 최근 심사가 이래저래 복잡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윤 회장이 대외적으로는 포스코건설을 대표하겠지만 고문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 포스코 측은 “절대 (윤 회장을) 홀대하는 인사가 아니다”고 강변했다.
이번 인사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됐지만 윤 회장은 이구택 전 회장 재임기간(2003년 3월~2009년 2월) 동안 ‘포스트 이구택’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윤 회장은 2002년 포스코 전무에 이어 2004년 부사장, 2006년 사장에 올랐다. 2004년 전무, 2006년 부사장을 거쳐 2007년 사장이 된 정 회장보다 항상 한 발 앞서 나갔던 셈이다. 지난해 말 한수양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이 비리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사임하자 정준양 당시 포스코 사장이 포스코건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즈음 조기 사퇴설이 나돌던 이구택 회장의 후계자감으로 윤 회장이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 이구택’의 자리는 결국 ‘엔지니어 출신 대세론’을 등에 업은 정준양 회장의 차지가 됐다. 그동안 김만제 전 회장을 제외하곤 엔지니어 출신들이 포스코 회장직을 맡아온 전례가 되풀이된 셈이다. 지난 1월 회장 후보 경쟁 당시 정준양 회장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자 “윤 회장 계열인 핵심임원 몇 명이 정 회장 지지세력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여기에 특정 후보에 대한 음해성 투서까지 등장하면서 정준양-윤석만 두 사람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평까지 나오기도 했다. 때문에 앞으로 윤 회장 세력을 어떻게 아우르느냐가 정 회장의 조직 장악 여부에 큰 변수가 될 전망이다.
박태준 명예회장과의 관계 역시 정준양호 순항 여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 명예회장은 ‘한국의 카네기’로 불릴 정도로 포스코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번 회장 선임처럼 포스코에 굵직한 일이 있을 때면 그가 늘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박 명예회장이 이명박 대통령 인재풀인 소망교회 교우인 점 때문에 지난 정권 때 선임된 이구택 회장이 물러나고 새 회장이 선임되는 과정에서 그의 의중은 정·재계의 큰 관심사였다.
‘포스트 이구택’ 경쟁이 정준양-윤석만 2파전 구도로 좁혀진 1월 말엔 포스코 퇴직임원 모임 ‘중우회’가 성명을 통해 차기 회장감으로 ‘도덕적 흠이 없는 인물’을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는 정준양 회장과 관련 도덕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던 시점이라 일각에선 박태준 명예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중우회 성명 내용이 정준양 회장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됐다. 이 같은 해석은 박 명예회장이 윤 회장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관측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윤 회장이 포스코에서 퇴직 임원들 예우·관리를 오랫동안 맡아온 까닭에 중우회의 성명 내용을 윤 회장에 대한 우호적 표현으로 보는 시선도 생겨났다.
포스코 측은 박 명예회장에 대해 “명예회장 역할만 하실 뿐 내부인사에 관여하는 법은 절대 없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회장 선임 과정에서 특정인사 편을 들고 나섰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박 명예회장이 포스코에 미치는 영향력을 높게 보는 재계 관계자들은 “정준양 회장이 박 명예회장 측의 견제를 뚫고 회장직에 올랐다”며 큰 의미를 두려 한다. 정준양 회장 체제하에서 ‘친 박태준’ 성향 인사들이 빛을 보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내부 조직 추스르기에도 바쁠 정준양 회장은 외풍 구설수에도 직면하고 있다. 당초 이구택 전 회장의 잔여임기 1년을 채우고 내년에 재신임을 받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정 회장은 3년 임기를 보장받았다. 정준양 체제를 뒷받침할 신규 사외이사진에 현 정부와 돈독한 관계에 놓인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면서 외압설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이에 포스코 측은 “(정준양 회장은) 줄곧 현장업무만 했던 분인데 무슨 권력층과의 인연이 있겠느냐”라며 정색한다. 새 이사진 모두 검증을 거친 인사들인 만큼 원만한 경영을 해나갈 것이란 입장이다.
사실 ‘민영화된 공기업’ 포스코를 둘러싼 외풍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주성 전 국세청장(구속) 비리혐의 수사과정에서 이구택 전 회장 자택 압수수색설이 퍼진 데 이어 이 전 회장이 잔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자 어김없이 외압 의혹이 불거졌다. 이 전 회장은 지난 1월 16일 포스코 CEO포럼에서 사임 의사를 밝히며 “외압은 절대 없다. 임기에 연연할 생각이 없었다”고 못 박았지만 외압설을 가라앉히진 못했다.
포스코 역대 회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날 때마다 따라붙었던 외압 구설수는 정준양호 출범 이후에도 어김없이 유령처럼 포스코 주변을 맴돌고 있다. 포스코 안팎의 거물급 인사들 간 알력으로 불거진 내부 문제와 숙명처럼 포스코를 향하는 외풍 논란이 빚어낼 역학관계가 정준양호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