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점령시대… ‘친이와 뭐가 다른가’
친이 친정체제를 비판하던 친박계 인사들이 ‘친박 친정체제’를 구축해 새누리당 곳곳에 비난 여론이 일고 있다. 2012년 11월 당시 박근혜 대선후보가 새누리당 전국위원회에 참석해 황우여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최근 전·현직 친박계 의원 보좌관 몇 명이 점심을 함께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밥상에는 이내 쓴 소주가 올랐고, ‘자아(당)비판’은 꽤 오래 이어졌다. 이들은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2기 체제가 완성되자 “역사는 도돌이표”라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원조 친박으로 지난 대선에서 ‘백의종군’을 선언했던 최경환 의원이 7개월 만에 원내대표로 뽑혔다. ‘수해골프’ 파문의 주인공인 홍문종 의원은 당 사무총장이 됐다. 대선정국에서 “사석의 일을 왜 정보보고 하느냐”며 기자들에게 욕설을 해 파문을 일으켰던 김재원 의원은 당 전략기획본부장에 기용됐다. 청와대(허태열 비서실장, 이정현 정무수석)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당·청은 ‘친박 점령시대’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지난 2008년 7월. 이명박 정권의 첫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표에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이 뽑히고, 이재오계 핵심인 공성진 의원, 박순자 의원 등이 최고위원이 되자 친박계는 “당이 청와대의 거수기 노릇을 하게 될 것”이라 성을 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내가 박희태 당시 후보에게 ‘(박 후보는) 청와대의 목소리를 (당에) 전달하는 청와대 출장소라는 얘기까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수차례 물었다.”(허태열)
“(친이계 친정체제 구축은) 사실상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안이다. 곧바로 대통령의 사당화, 제왕적 대통령제 부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이정현)
그리고 2년 뒤. ‘박희태 체제’가 끝난 2010년에는 친이계 핵심인 안상수 신임 대표에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최고위원까지 당 지도부를 친이계가 싹쓸이하자 친박계는 “임기 2년을 채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친박계의 그런 지적이 지금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당 내부는 그 때와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 때처럼 그리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즉, 친박계 친정체제는 ‘그들만의 지도부’일 뿐, “이제부터는 우리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 새누리당 의원 절반 이상에 달하는 초선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초선들의 성토를 들어보자.
“지난 원내대표 표를 분석해봐라. 8표 차이였다. 초선들이 대거 움직인 것이다. 아니면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없다. 앞으로 모든 의제는 의원총회를 거쳐야 할 것이고, 당론은 그야말로 당내 의견을 수렴해 진행해야지, 아니면 사사건건 반기를 들겠다.”(대구·경북지역 초선)
“이한구 전 원내대표가 19대 초반에 국회가 문을 못 열자(개원을 못하자) ‘무노동 무임금’이라면 세비를 반납했다. 아무한테도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기가 친박계고 또 박 대통령 경제교사였으면 다냐. 생계형 국회의원도 얼마나 많은데 그걸 밀어붙이냐?”(비례대표 초선)
왼쪽부터 최경환 원내대표, 홍문종 사무총장,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단이나 원내대변인 인선을 놓고서도 말들이 많다. 일부 의원은 “‘원조 친박 누구누구랑 친하다, 누구 라인이다’라는 것 빼고는 존재감이 없었던, 아니 이름도 잘 모르는 의원들이 대폭 기용됐다. 정말 당 돌아가는 꼴이 웃긴다”고 비꼬고 있다.
아직 숨죽이고 있지만 이런 당내 비판세력이 하나둘 언론에 등장하게 되면 당장 ‘친이계 친정체제’를 겨냥했던 원조 친박계로선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친박계의 분화가 이뤄지면서 몇 안 되는 원조와 다수의 ‘비판적 친박’으로 나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 정치권 인사는 “앞으로 박근혜만 한 큰 인물이 새누리당에 있을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자기정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선두에는 친박계지만 정권 초반에는 말을 아끼겠다는 유승민 국회 국방위원장이 있고, 친이계에서는 ‘개헌 전도사’로 나선 이재오 의원이 있으며, 소장파 격에는 남경필 의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선들의 세 규합에 앞서 계파를 초월한 재선 의원들이 의기투합하기로 한 것을 두고도 “원조 친박의 전횡을 묵과할 수만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뒤따른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2016년 20대 총선은 박근혜가 공천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과 “한 사람 밑에 줄을 서는 계파의 의미는 이제 없다. 실질적인 재선의 경쟁력을 갖추자”는 선견지명이 투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와 중도 모두 아우르면서 정치, 경제, 안보 등에 대해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자는 주장이다. 친박계에서는 이학재 조원진 의원 등이, 친이계에서는 김희정, 정문헌 의원, 비박계에서는 안효대 홍일표 의원 등이 중심이 될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한 비박계 인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한번 정권을 창출했던 친이계나 비박계 중 특히 다선 의원들은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도덕성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최근 이렇게 중책을 맡는 것은 분명 친박계가 인력난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로 견제하고 비난하는 원조 친박계 중진들이 제 팔 제가 흔드는 식으로 갈 때 ‘박근혜 외 사람들’이 ‘포스트 박근혜’를 키울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친박계보다는 친이계의 정치적 수완이나 능력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가 친박계 당직자, 당원, 보좌진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