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신박’ 한계… ‘10년 친박’ 원대복귀
![](https://storage2.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12/1370994362571220.jpg)
이정현 정무수석(오른쪽)의 홍보수석 복귀는 박근혜 대통령의 용인술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요신문 DB
지난 6월 5일 오전 6시 55분쯤 청와대 춘추관 제1기자실. 고참 출입기자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이정현 신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출근해 있는 기자는 석간신문과 일부 방송, 통신사를 포함해 10명 남짓. 탄성이 나온 까닭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청와대 관계자가 기자실에 들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수석은 이날 인사치레로 들른 게 아니라 기자들의 질문에 응대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조간신문을 읽은 기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자신에게 확인 전화를 거는데, 이를 일일이 받아줄 수 없으니 ‘미니 브리핑’을 위해 아예 기자실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이 수석은 “최소한 오전, 오후 한 번씩은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이 수석은 ‘목욕탕 아침 토크’를 제안하기도 했다. 춘추관 지하1층에 있는 작은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며 아침 미니 브리핑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다소 엉뚱한 구석도 있었지만, 이날 이 수석의 기자실 방문은 많은 기자들에게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대언론 정책이 변화를 맞고 있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용인술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이번 인사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에서 촉발됐다. 결국 ‘윤창중 파문’이 박 대통령의 인사 원칙 변화로까지 이어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6월 3일 이 수석이 정무수석에서 홍보수석으로 보직이 변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기자들은 “역시나~” 하면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이 수석이 홍보수석을 맡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당초부터 제기돼 왔었지만,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정무수석에서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일종의 ‘강등’이다. 9명의 청와대 수석 사이에도 엄연히 서열이 존재한다. 청와대 조직도상 왼쪽부터 선임이 된다. 정무, 민정, 홍보, 국정기획, 경제, 미래전략, 교육문화, 고용복지, 외교안보 수석 순이다. 정무수석이 홍보수석으로 옮겼다는 것은 ‘넘버 원’이 ‘넘버 쓰리’가 됐다는 얘기다.
이 수석 역시 홍보수석을 맡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이미 당직자 시절부터 부대변인, 대변인 등 공보라인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탓에 이 수석 스스로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첫 조각 때 그가 정무수석을 맡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남기 전 홍보수석이 ‘윤창중 파문’으로 옷을 벗은 뒤에도 이 수석은 ‘홍보수석으로 옮기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무 파트 일이 너무 재미있다. 이제 일 좀 하려고 하는데 엉뚱한 얘기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했었다. 이 때문에 5월 31일 박 대통령과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간담회 당시 허태열 비서실장은 이 수석의 홍보수석 기용 가능성에 대해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라며 부정적인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박 대통령이 매우 이례적인 인사를 단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수석은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최측근. 하지만 박 대통령은 10년여 동고동락한 비서들에게까지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주 가까운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별로 원치도 않는 자리에, 더욱이 급을 낮춰가면서까지 보내는 것은 전혀 박 대통령 스타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 수석의 홍보수석 기용이 박근혜식 용인술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해석하는 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용인술의 변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한 마디로 ‘친박(친박근혜)계의 복원’이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고도 첫 조각 때 상상 이상으로 소외됐던 친박계가 윤창중 파문을 계기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전문성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 상 향후 인사에서도 무분별하게 친박계를 등용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정무적 감각과 소통 능력, 정치력이 필요한 자리에는 친박계를 기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창중 파문은 ‘1기 박근혜 정부’에 대거 진출한 테크노크라트와 전문가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줬다”며 대통령 주변의 인적 쇄신 필요성을 거론했다. 이 의원은 “‘10년 친박’들을 제치고 ‘3개월 신박’들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번에 사고를 친 것도 ‘3개월 신박’이었고, 뒷수습을 엉망으로 한 것도 ‘3개월 신박’이었다”면서 “대통령 주변에 로열티 있고 정무적 판단도 되는 사람들이 포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이 수석을 홍보수석에 앉힌 것도 이 의원의 문제의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는 홍보수석의 특성상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정치 경험이 있으면서 대통령과도 잘 통할 수 있는 인물, 다시 말해 친박계 인사가 기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과 통한다.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친박계 원로인 현경대 전 의원이 임명되고, 일부 공기업에 대선 때 기여했던 친박계 인사들이 하나둘씩 기용되는 등 변화는 이미 조금씩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윤창중 파문 이후 한결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누리당 친박계의 움직임이다. 실세 원내대표로 통하는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무장관제 부활 또는 대통령 정치특보 신설’ 주장을 폈다. 표면적으로는 야당을 설득하고 여당과 소통하는 일을 전담할 무게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발언권 있는 친박계 인사가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는 뒤집어 보면 친박계 중심의 여당이 청와대와 정부에 할 말은 하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 ‘공약가계부’에 대해 새누리당이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지나치게 축소됐다며 제동을 건 것이나, 원전 사태와 관련해 정부를 강하게 질책한 것 모두 새누리당이 새롭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다. 박 대통령의 필요에 의한 친박계의 복원이 향후 청와대와 여당 간의 미묘한 긴장으로 비화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