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수 두더니 권좌까지 흔들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원안)과 박찬구 석유화학 부문 회장. | ||
“대우건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좋은 회사입니다.”
지난 6월 30일 일본 방문을 마치고 공항으로 입국하던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말이다. 이를 두고 금호아시아나의 한 관계자는 “뒤늦게 인수했지만 그 어느 계열사보다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대우건설을 내놓기로 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한편으로는 대우건설을 빠른 시일 내에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팔아야 하는 부담감도 엿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항공·석유화학·물류와 함께 건설을 그룹의 한 축으로 성장시키려던 박 회장이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올해 말로 예정된 대우건설 풋백옵션 조항(대우건설 주가가 2009년 12월까지 3만 1500원을 밑돌 경우 투자자들에게 그 차액을 보전해준다는 내용) 때문이다. 현재 대우건설 주가는 1만 3000원대.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금호는 3조 원에 가까운 돈을 투자자들에게 지급해야 한다.
풋백옵션에 대해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며 자신만만해 하던 금호가 대우건설을 매각하기로 한 것은 그룹 안팎에서 ‘대우건설을 고집하다간 자동차를 지키려다 망한 대우그룹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지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당국은 올해 초부터 금호 측에 강도 높은 자금 마련 방안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금호아시아나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뒤늦게 해결하려 했지만 대우건설 매각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주요 계열사들이 대우건설 지분을 가지고 있어 그 부담이 그룹 전체로 번질 수 있었다”라고 귀띔했다.
이번 대우건설 매각 결정으로 금호의 자금 압박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평가다. 주 채권단인 산업은행에서도 박삼구 회장의 결단에 높은 점수를 주며 최대한 편의를 봐주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당초 산업은행이 조성하는 사모펀드의 대우건설 지분 인수가 유력했다가 금호 측이 희망했던 공개 매각 쪽으로 선회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박삼구 회장이 이렇게 빨리 대우건설 매각을 결정할 줄은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수 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대우건설을 매각하더라도 금호는 대규모의 투자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사들인 가격은 6조 4225억 원. 그러나 현 경제상황에서 이 정도의 가격을 부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대우건설 지분을 갖고 있는 금호산업(지분율 18.6%), 금호타이어(5.6%), 금호석유화학(4.5%), 아시아나항공(2.8%) 등의 주가가 대우건설 매각이 알려진 후 하락하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일각에서는 금호석유화학과 함께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금호산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 그룹 지배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란 말도 들린다.
또한 재계서열에서도 금호아시아나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금호아시아나의 자산총액은 37조 5000억 원으로 대우건설이 빠지면 27조 원대로 줄어든다. 이는 라이벌 한진(29조)에게 밀리는 것은 물론 두산(27조 3000억 원)과도 비슷한 규모다. 금호아시아나가 금호생명 등 계열사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순위는 더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재계 5위 달성’을 기치로 내걸었던 박삼구 회장의 꿈이 한참이나 멀어진 셈이다.
어찌 됐건 대우건설 매각 결정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금호아시아나가 가야할 길은 아직 험난하기만 하다. 우선 ‘결정’은 했지만 대우건설 매각이 불투명해 보인다는 것. 지난 2006년 업계 1위인 대우건설 인수전에서는 한화 유진 프라임 등이 참여하며 뜨거운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과연 지금 이러한 초대형 매물을 사들일 곳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후보로 거론되는 몇몇 기업들은 하나같이 “검토한 적도 없다”며 일축하고 있다. 이는 수조 원대의 자금이 부담되기도 하거니와 대우건설이 금호아시아나에 인수된 후 ‘자산이 줄어들고 부실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과 금호아시아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대한통운의 추가 매각설이 계속되는 것도 대우건설 매각이 지지부진할 것이란 전망과 맞닿아 있다. 매년 1000억 원에 가까운 이익을 내며 알짜배기 회사로 정평이 나 있는 대한통운이 대우건설과 묶여서 시장에 나올 경우 대기업들이 과감한 베팅을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금호아시아나 역시 대우건설 매각이 잘 되지 않으면 대한통운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금호는 대한통운 인수시에도 풋백옵션 조항을 맺은 바 있다. 올해 9월부터 4년간 대한통운의 3개월 평균 주가가 17만 1000원을 밑돌 경우 재무적투자자(FI)에게 보전해준다는 내용이다. 현재 대한통운 주가가 8만 원대에 그치고 있어 풋백옵션 문제는 금호아시아나에게 또 다른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1조 원대의 회사채 역시 금호아시아나를 짓누르고 있다. 자금 압박이 심해질수록 대한통운 매각 가능성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금호가 대우건설 매각을 놓고 어수선한 사이, 내부에서는 박삼구 회장의 동생 박찬구 석유화학부문 회장 부자의 지분 변동이 눈길을 끌었다(<일요신문> 894호 보도). 박찬구 회장 부자가 금호산업 지분을 줄이는 대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늘리며 4형제가 계열사 주식을 똑같이 가지고 있던 전통이 깨진 것.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박찬구 회장 부자가 금호석유화학을 정점으로 하는 석유부문 계열사들을 떼어내 독립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 지분 변동이 금호아시아나 안팎에서 불거지고 있는 ‘박삼구 책임론’과 맞물려 또 다른 해석을 낳고 있기도 하다. 복수의 금호아시아나 내부 관계자들은 “지금 회사 내부에서는 무리한 M&A를 추진한 박삼구 회장이 이번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니 형제 승계 원칙에 따라 동생인 박찬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줘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찬구 회장이 그룹 지배구조의 한 축인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계열 분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