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네임 찾았다” 다음 날… “모두 폐기하자”
지난 14일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을 두 달여 수사한 끝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추가 고발 건에 관한 보완 수사가 남은 상황이지만 6개월간 이어진 국정원 수사 ‘제1막’이 내린 것이다. 검찰 수사 발표 이후 야당은 잇따라 ‘몸통론, 배후론’을 제기하며 정부와 여당을 압박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이미지로 비칠 것을 우려했던 민주당이 적극 공세에 나선 것이다. 국정원 사건의 ‘제2막’이다. 특히 야권에서는 12월 16일 수서경찰서 중간수사결과 발표 전후 있었던 일을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별수사팀 수사보고서를 토대로 12월 16일 전후를 재구성했다.
2012년 12월 1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민주통합당 당직자들이 현관문을 지키고 있다. 임준선 기자
“2박 3일 동안 감금하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가족들도 못 만나게 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가 아닌가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따져 물었다. 18대 대선 3차 TV토론장이었다. 지난 1·2차 TV토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거센 공세를 받았던 박 후보는 3차 TV토론 직전 이 후보가 사퇴하자 작심한 듯 문 후보를 몰아붙였다. 11일 밤 민주당의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 오피스텔 급습 사건으로 여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문 후보는 “새누리당이 국정원을 비호하는 것인가.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대통령 후보가 개입해선 안 된다”고 맞받았다.
토론이 끝나고 30분 뒤인 밤 11시. 수서경찰서는 “국정원 여직원 김 씨의 PC를 분석한 결과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에 관한 지지·비방 내용의 게시글 및 댓글을 단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대선 승기는 새누리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복수의 야권 관계자들은 “대선 직전 주말, 실제로 골든크로스가 일어났다. 16일 밤 경찰 중간수사발표는 대선 흐름을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골든크로스란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항상 앞서있던 박근혜 후보를 문재인 후보가 역전했던 순간을 의미한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블랙박스(여론조사공표금지) 기간 조사 추이를 보면 방송 3사에서는 17일 골든크로스가 있었고,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16일 골든크로스가 있은 후 17일 (박근혜 후보가) 재역전했다. 전날 밤 TV토론과 경찰 중간수사발표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1월 4일 김 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임준선 기자
분석관1 : 주임님 닉네임이 나왔네요(분석관 2명 박수 짝짝짝).
분석관1 : 피곤하죠? 한 시간이면 끝나겠죠? 이거 봐요.
분석관2 : 음 우리가 찾았네. 일단은 이 사람이 쓴다는 부분이 나왔네.
분석관1 : 고기 사주세요.
분석관2 : 국정원이 책임…, 지우지 말라고…, 다 있어…, 일단 이 자료부터.
2012년 12월 15일 새벽 4시경. 분석관들은 국정원 여직원에게 건네받은 PC에서 아이디(ID)와 닉네임을 찾아내자 입으로 박수 소리를 냈다. 분석이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전날까지도 분석관들은 증거 및 수사단서 발견시 신속히 수사팀으로 인계하는 등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중요수사 단서인 ID·닉네임 등을 인계했다. 하지만 다음 날 분석관들의 대화는 사뭇 달라졌다.
분석관1 : 안 되죠. 나갔다가는 국정원 큰일 나는 거죠. 우리가 여기까지 찾을 줄은 어떻게 알겠어.
분석관2 : 우리가 판단하면 안 되고. 기록은 (보고가) 올라가겠지만. 안하겠지.
분석관1 : 노다지다 노다지. 이 글들이 다 그런 거야.
분석관2 : 그거 혼자는 안했을 거 아냐.
분석관1 : 보시면서 코멘트를 달아 달라고 하시거든요. 우리 쪽에서 답을 달아야 할 거 같아요.
16일 새벽 1시경. 아직 분석이 완료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분석관들은 언론 브리핑 자료를 검토하며 답변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 씨의 인터넷 접속기록 분석을 통해 ‘오늘의 유머’ 1만 7116건, ‘보배드림’ 1348건, ‘뽐뿌’ 1076건 등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접속 현황 역시 파악했지만 이는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포함되지 않았다. 분석종료 시점에서 확인된 정치인·정당 관련 게시글 및 찬반 클릭 자료가 100여 쪽에 달하였지만 모두 폐기된 채 수사팀에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경찰청은 16일 밤 11시 직전 수서경찰서에 송부된 디지털증거분석 결과보고서 역시 허위로 작성했다. 분석팀은 대선후보 등 정치인과 정당에 관한 지지·반대 글 및 찬반 클릭 활동에 사용된 40개의 ID·닉네임, ‘오늘의 유머’ 등 여론 사이트 접속기록 등을 발견했음에도 보고서에는 “혐의사실 관련내용을 발견치 못함”이라고 기재했다.
검찰이 확인한 공식 분석종료 시점은 16일 밤 9시 15경. 하지만 수서경찰서는 대선 당일인 19일이 넘어가서야 분석물 전체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 6월 20일 참여연대는 국정원 여직원 PC를 조사했던 분석관 10명 등 경찰 15명을 추가 고발했다.
2012년 12월 16일 3차 TV토론회 전 악수하는 문재인·박근혜 후보. 3차 토론 4일 전인 12일 민주당 당직자들이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 현관문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국정원 한 관계자가 발언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은 증거분석이 진행되던 14일부터 16일 밤까지 주말임에도 이례적으로 출근해 직접 상황을 점검했다. 김 청장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컴퓨터가 아닌 수기로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국정원 여직원 노트북에서 복구된 메모장 문서 파일 내용과 인터넷 접속 현황 등 중요 상황을 파악했다. 민주통합당 측이 접수한 고발장을 또한 직접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수서경찰서에 증거분석 상황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16일 밤 기습 발표 역시 김 청장의 아이디어였다. 김기용 경찰청장과 이광석 수서경찰서장에게는 그날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보도자료 배포 계획을 알렸다. 보도자료 및 디지털증거분석 결과보고서는 일단 김 청장에게 보고된 뒤 수서경찰서에 송부됐다.
검찰은 수사보고서에서 “대선 수일 전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국정원 직원이 수십 개의 ID·닉네임을 사용하여 인터넷 여론 사이트 등에서 활동한 사실이 다수 확인되었고, 이를 기초로 추가 수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하는 게 맞았다”고 밝혔다.
이날 김 청장은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다. 서울청장이 일선 경찰서 실무책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 검찰 조사에서 그는 “수사를 잘하라는 취지의 격려 전화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김 청장은 국정원 여직원 김 씨의 영장청구를 준비하고 있는 권 과장에게 “법적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안을 압수수색영장 신청이 적절하느냐”라고 전화로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경찰수사 도중 송파경찰서로 전보 발령된 권 과장은 지난 4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청이 분석 키워드 100개를 4개로 축소했으며, 분석결과물 송부를 지연시키는 등 부당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날 김 청장이 전화로 수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이가 또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17일 “지난해 12월 16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중심으로 권영세 당시 캠프 종합상황실장(현 주 중국 대사)과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여러 차례 통화했다”고 폭로했다. 박 국장은 검찰을 20년이나 출입한 베테랑 정보원으로 국회에도 3년간 파견돼 있었다.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은 권영세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했다.
12월 16일 낮, 김무성 새누리당 선거대책본부장은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국정원 여직원 PC 1차 조사에서 아무런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알렸다. 수사팀인 수서경찰서조차 디지털 분석보고서를 받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여의도 당사로 자리를 옮긴 김 본부장은 오늘 안에 수사결과를 발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선규 캠프 대변인 역시 상황을 예감했다. 3차 TV토론이 끝난 직후인 밤 10시 40분경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한 박 대변인은 “아마 제 생각에는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조사결과가 오늘 나올 겁니다”라고 단언했다. 박 대변인의 발언이 있은 지 20분 뒤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나왔다.
6월 임시국회에서는 국정원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비호한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 10일 신경민 민주당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16일 3차 방송토론회 직후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밀렸다는 평가가 나오자 차문희 당시 국정원 제2차장은 “큰일 났다. 박 후보가 잘못해서 토론이 엉망진창이 됐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일자 신문) 조간을 판갈이해야 한다”며 김용판 청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직거래’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황교안 법무장관은 “지금 그런 부분에 대해 전반적으로 검찰이 수사를 하고 있다.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해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5. 민주당의 역공작?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은 국정원 전·현 직원의 내부정보 유출로 인해 알려질 수 있었다. 이를 기획한 것은 전직 국정원 간부인 김상욱 씨였다. 김 씨는 지난 19대 총선 당시 민주당 경기 시흥갑에 공천을 신청했던 인물. 김 씨는 고향 후배이자 현직 국정원 직원인 정 아무개 씨(파면)와 국정원 3차장 산하 심리전단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70여 명 규모로 알려졌는데 19대 총선 직전인 지난해 2월, 3개 팀에서 4개 팀으로 확대 개편됐다. 새로 생긴 팀은 SNS전담팀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쫓는 과정에서 정 씨는 심리전단 소속 직원을 미행하거나 고의로 차량 사고를 내 숙소 위치를 알아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가 민주당으로부터 국정원 기조실장이나 총선 공천을 약속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새누리당 측은 “김부겸 전 의원이 이번 민주당 국정원 공작의 몸통”이라며 “김 씨가 김부겸 전 민주당 의원의 한 보좌관과 지속적으로 통화하며 심리전단 직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행 사실도 주기적으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결과는 발표됐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지난 20일 여야 원내대표는 “국정원 관련 국정조사를 6월 안에 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