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장가 못간 것이 대역죄인가요?
▲ 영화 <올드 미스 다이어리> | ||
명절이 두려운 사람들 중 ‘국가대표급’은 뭐니 뭐니 해도 나이 꽉 찬 미혼 남녀들이다. 이때가 되면 부모한테 듣는 잔소리도 모자라 친척들까지 합세해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환경전문기업에서 일하는 J 씨(여·30)는 지난 설에 큰 곤욕을 치렀다. 새해 첫날만 집에 잠깐 다녀오고 설날에는 내려가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매번 명절 때마다 친척들 잔소리가 심해서 간단히 부모님만 뵙고 왔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친척들이 ‘인연을 끊고 살 거냐’는 둥 난리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매번 받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도저히 볼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부모님께서는 이제 별 말씀 안하시는데 오히려 친척들 참견이 더 심하죠. ‘지금 결혼해도 넌 이미 노산’이라면서 압박을 주는데 마치 대역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죠. 그 스트레스가 말도 못 해서 명절만 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니까요.”
30대 중반을 향해 달리는 G 씨(여·34)도 명절 스트레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기업에 다니며 나름 탄탄한 경제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가친척이 모일 때면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자란 인간’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제가 그동안 이뤄놓은 것이나 가지고 있는 가치관 등 한 사람을 평가하는 요소는 ‘결혼 못한 과년한 처자’라는 타이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결혼을 해야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웃기죠. 그런 조롱과 나무람 틈바구니 속에서 며칠을 왕래도 않던 친척들과 보내느니 깔끔하게 여행을 가요. 부모님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자기 앞가림 확실히 하고 잘 살고 있는데 굳이 결혼에 목맬 이유 없다’고 하시거든요. ‘쓸데없이 시달리느니 차라리 편히 쉬고 오라’고 하는 편이에요.”
G 씨처럼 혼기가 꽉 찬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 없는 것이 남성 싱글들이다. 여성들은 결혼에 큰 뜻이 없거나 급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남성은 본인이 원해도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하루 종일 가족과 마주앉아 있는 명절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정유회사에 근무하는 S 씨(35)는 명절 보낼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20대에는 제법 인기도 있었고 결혼이 급하지도 않아 마음 놓고 있었죠. 그러다 어느 새 30대가 됐고 벌써 중반이에요. 매일매일 부모님 얼굴 뵙기도 민망할 때가 있는데 명절에는 부담 백배죠. 친척들이 이젠 물어보지도 않아요. 대신 뒤에서 수군대는 게 느껴지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서른 중반까지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은 거죠. 친척 동생들은 벌써 아이까지 딸려 인사를 오는데 그럴 때마다 방문 닫고 혼자 있기도 뭐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하 웃고 대화하지만 속은 편치 않아요. 그렇다고 명절을 위해 아무하고 결혼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그러면 친인척들에게 ‘완벽한 불효자’로 낙인찍힐 것만 같아 꾹 참고 죽은 듯이 명절을 보낸다는 S 씨. 그는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마음이 편해 어떻게든 회사에 나갈 궁리를 할 때가 많다”면서 “연휴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고백했다.
사실 미혼들에게만 명절이 괴로운 것은 아니다. 기혼자들에게도 명절은 양면적이다. 그리운 만남의 기쁨과 동시에 심적·육체적 부담감을 안겨준다. 결혼 1년이 다 되가는 C 씨(여·31)는 전형적인 주부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에 출근 안하는 게 딱 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죠. 그 외에는 힘든 일투성이죠. 명절에 오히려 병을 얻어올 때가 많다니까요. 결혼하고 지금까지 두 번 명절을 치렀는데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이 현실이구나’ 하고 느꼈죠. 결혼 전에는 밥 먹고 TV 채널 돌려가면서 누워서 휴일을 만끽했는데 이젠 아니에요. 음식 준비에 어른들 눈치 보느라 발 뻗고 잠시 쉴 틈도 없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더욱 그렇죠. 남편은 시댁에만 가면 나무늘보가 되고요. 아무리 눈치를 줘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죠. 명절 연휴 끝나고 싸웠다는 친구 부부들 많이 봤는데 이젠 저도 크게 다르지 않네요.”
남편들도 할 말은 있다. 얼마 전 한 포털사이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혼 남성의 절반 이상이 ‘처가에서 보내는 명절이 곤혹스럽다’고 답했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Y 씨(33)는 연휴의 마무리는 항상 처가에서 보내지만 늘 어색하다고.
“평소 싹싹한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처가에 가면 나서서 일을 돕기도 뭐하고 어색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요. 장인어른이나 장모님과 영양가 없는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기도 하지만 금방 할 말이 없어지죠.
좀 살갑게 대하고 싶기도 한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처남이나 형님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회사 얘기도 나오는데 그런 자리에서 은근히 비교당하는 것도 피곤합니다. 어른들은 얼굴만 보면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하시는데 할 말 없어서 그러시는 것은 알지만 이젠 그만했으면 할 때가 더 많죠.”
경제적 부담 때문에 명절을 꺼리는 직장인들도 많다. 맞벌이를 하는 H 씨(36)는 인터넷 관련 기업에 다니면서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다. 아내는 작은 기업에서 사무직으로 일한다.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형제들도 보고 좋긴 하죠. 하지만 어려운 살림에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설 같은 경우에는 아이들 세뱃돈까지 줘야 하는데 형제가 많다보니 아무리 규모를 줄이더라도 목돈이 뭉텅 나가요. 큰형수님한테 음식장만 비용까지 보태고 나면 아내와 저는 한숨을 쉽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명절이 그리 달갑지 만은 않습니다.”
명절 증후군으로 추석이나 설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마음이 무거워지고 불안한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가지고 스트레스를 풀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 심리 상담 전문가는 “무조건 참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며 “일단 자신이 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작은 것이라도 마음을 터놓고 가족과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