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금 접수중’ 김설송 행보 심상찮다
지난 2011년 12월 17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후계자로 삼남 김정은을 낙점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에 이어 반세기를 이어 온 ‘공화국’의 미래를 어린 아들에게 넘기기 전까지 여간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주변부를 맴돌며 해외에서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장남 김정남이나 권력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 차남 김정철에게 권력의 열쇠를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렵사리 삼남을 후계자로 낙점했지만 묘수가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그 묘수는 바로 어린 지도자를 ‘치마폭’으로 감싸는 것. 즉 북한 권력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세 여인 김경희, 리설주, 김설송이 그 답이었다. 지금 북한 권력의 중심에 이 세 여인이 있다.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제1백화점 상품전시회를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맨 왼쪽이 김정은의 이복 누나 김설송 씨. 연합뉴스
우리 정부와 북한학계에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나돌 당시부터 가장 주목했던 인물은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이자 후계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었다. 실제 장 부위원장은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함께 김정은 시대, 가장 주목 받는 권력의 추로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장성택 부위원장이 갖고 있는 힘의 실체를 둘러싼 분분한 해석이다. 결국 장 부위원장의 지도력과 정치적 힘은 자신의 부인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유일한 동복 여동생 김경희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경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북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여인이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생전까지 각별하게 믿고 감쌌던 유일무이한 동복 혈육이자 김일성 주석이 두 눈에 넣고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꼈던 딸이기도 했다. 북한 권력부에 있었던 인사들은 김정일에게 유일하게 큰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인물로 기억된다.
김일성대학 졸업 직후인 1975년, 처음 당 국제부에 입성한 이래 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근거리에서 통치에 가담했다. 당 조직지도 경력만 40년에 가까운 노련한 정치가인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후 국내 한 연구소에 의해 입수된 김정일 유서(추정문건)에서 김 위원장이 지목한 ‘유언 집행자’ 역시 김경희 부장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사전에 작성한 유서를 통해, 유언 집행자로 김경희 부장을 직접 지목하며 김정은의 통치를 당적으로 책임지고 ‘후견’하도록 명시했다. 명실상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뒷배인 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국내외에 비밀스레 잠겨있는 통치자금의 관리자로 김경희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척이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정일의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진 ‘당 36호실’. 이는 김정일 통치의 핵심과 같은 역할을 했다. 36호실 실무를 장악하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실력과 믿음을 겸비한 이는 많지 않다. 장남 김정남 역시 해외에서 비자금 관리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총괄적 책임자로 김경희가 지목됐다는 것은 김정일이 생전에 김경희를 얼마나 믿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8년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김경희는 본격적으로 권력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를 직접 보좌하며 동행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스케줄을 관리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과 관련한 주요 문건이 보관돼 있는 서재의 접근 허락을 맡은 이도 김경희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을 1~2년 전후해 그가 여성 최초로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고 당 정치국 위원, 중앙위원회 위원 등 당 요직을 꿰찼다는 것은 김정은 시대 그의 핵심적 역할을 뒷받침한다.
관건은 역시 그녀의 몸 상태다. 칠십에 가까운 노령의 나이와 함께 알코올 중독, 우울증, 간질환 등을 앓아온 그의 병력 탓에 과연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의 정상궤도에 도달할 때까지 후견인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가 현재로선 미지수다. 최근 들어 활동이 뜸해진 김경희는 간질환 재발설과 함께 해외 치료설까지 나돌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3월 당 경공업 대회 때였다.
# ‘시대의 상징’ 퍼스트레이디 리설주
북한의 퍼스트레이디 리설주는 ‘김정은 시대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지난해 7월,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현장에 처음 등장한 이래, 리설주의 행보는 가히 파격에 가깝다. 현지지도에서 드러난 리설주의 모습은 자신의 남편 김정은에 자연스레 팔짱을 끼는가 하면, 유치원 방문 당시에는 여느 어머니처럼 다정스럽게 아이들을 다독였고, 심지어 지난 9월에는 한 가정집을 방문해 손수 설거지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북한의 역대 퍼스트레이디와 비교한다면, 그의 등장 자체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는 ‘리설주 쇼크’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리설주의 파격적 행보를 두고 고도의 정치적 연출로 해석하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리설주와의 결혼에 김정일 위원장이 깊게 개입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러한 연출 자체가 특정한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리설주의 행보를 두고 대중에게 ‘지도자 김정은은 어리지만,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믿음을 주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지도자 역시 일반 정상국가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물론 리설주 본인이 갖고 있는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다만 부부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김정은의 의사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무엇보다 지난 과거 목격된 리설주의 성향 자체가 지극히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라는 점, 중국과 유럽 등 유학 경험을 통해 익혀온 국제적 감각 역시 훗날 김정은 위원장의 대외적 행보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부분들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평양의 릉라인민유원지를 부인 리설주와 함께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앞서의 김경희, 리설주가 북한의 과거와 현재를 말한다면, 김정은의 누나 김설송은 북한의 미래를 담보할 핵심 인사라 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여인인 셈이다. 무엇보다 최근 권력의 중심추가 와병설이 나오면서 점차 그 역할에 대해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는 김경희에서 젊은 김설송으로 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
목한 유언 집행자이자 권력의 후견인은 분명 김경희지만, 이와 별도로 김 위원장이 김정은의 방조자로 지목한 이는 김설송이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통치자금에 대한 책임 소재를 김경희에게 맡겼지만, 와병 등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시 김경희의 대리인으로 직접 김설송을 지목했다. 김정일은 곧 김설송을 ‘북한의 미래’로 내다본 것이다.
1973년생으로 알려진 김설송은 김정일 위원장의 본처 김영숙 슬하에서 태어났다. 김 위원장의 후처 고영희 슬하에서 태어난 김정은과는 이복남매다. 또한 그는 김일성대 정치경제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로 알려졌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영특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도 곧잘 동행했으며 정치적 감각은 물론 행실도 바라 권력의 핵심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오죽했으면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간부들마다 한번쯤은 김설송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상상해 빠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나중에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정일의 와병설이 나돌 때부터 북한 내부에서는 이미 김설송을 삼남 김정은과 함께 유력한 후계자로 내다봤다. 김정일 위원장의 투병시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리를 지켰던 이가 김설송으로 알려졌으며, 일각에서는 이 시기 김경희가 갖고 있는 통치자금과 관련한 권한 일부가 이미 김설송에게 넘어갔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장성택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권력의 중심추로 끌어들인 것 역시 김설송의 아이디어라는 얘기도 있다.
현재 김설송은 당 서기국 소속인 것으로 추측된다. 서기국에서 그는 당군관계, 경제발전 방향, 대남전략 등 국가전략 핵심사안과 관련해 이미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은 김설송을 깍듯하게 ‘큰누님’으로 모시고 있으며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은의 같은 동복 여동생인 김여정이 존재하지만, 능력이나 존재감 측면에서 감히 김설송을 범접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의 마지막 부인이자 비서역할을 했던 김옥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김설송의 권력이 훗날 어디까지 나아갈까 하는 대목이다. 권력의 습성상 권력은 욕심을 낳고, 김설송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김설송이 김정은과 배다른 형제라는 점에서 훗날 권력암투 가능성은 누구도 배제하지 못한다. 김설송의 향후 역할과 성장은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면밀히 지켜볼 대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수렴청정 꿈꿨던 권력의 화신 김성애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다 숙청당해
3대 세습기에 들어간 지금 북한이 ‘여인천하’라고들 하지만, 북한 역사에는 이미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한 여인이 존재한다. 김일성 주석의 두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성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성애는 본래 김일성 주석의 비서 출신이다. 1940년대 말 김 주석의 비서실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김성애는 빼어난 미모로 김 주석의 눈에 들게 된다. 1949년 김 주석의 본처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친모인 김정숙이 죽자, 그는 3년 뒤인 1952년, 김일성 주석의 후처가 된다. 이때부터 김성애는 김정일, 정숙 남매를 맡아 키우게 되며, 본인도 김평일, 영일 두 아들을 낳는다.
김성애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1965년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부위원장을 거쳐 1972년 위원장이 되면서 부터다. 여맹은 북한 최대의 여성단체로서 당의 여성정책과 학습을 총괄하는 핵심 기관이다. 북한 최대의 여성단체 기관장이 된 그는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우상화를 통해 남편의 신임을 얻는 한편, 반대로 김 주석의 전 부인이었던 김정숙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스탠스를 통해 김성애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들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결국 ‘적자’ 김정일의 분노와 정치력을 넘지 못한다. 김정일에 의해 기획된 ‘곁가지 정리’로 인해 김성애는 1970년대 말 사실상 숙청됐고, 한때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아들 김평일은 외국으로 내쫓긴 채 변방국 대사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권력을 잡은 뒤, 계모 김성애와 함께 권력을 꿈꿨던 친인척들과 정치인들 대다수를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다 숙청당해
3대 세습기에 들어간 지금 북한이 ‘여인천하’라고들 하지만, 북한 역사에는 이미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한 여인이 존재한다. 김일성 주석의 두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성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성애는 본래 김일성 주석의 비서 출신이다. 1940년대 말 김 주석의 비서실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김성애는 빼어난 미모로 김 주석의 눈에 들게 된다. 1949년 김 주석의 본처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친모인 김정숙이 죽자, 그는 3년 뒤인 1952년, 김일성 주석의 후처가 된다. 이때부터 김성애는 김정일, 정숙 남매를 맡아 키우게 되며, 본인도 김평일, 영일 두 아들을 낳는다.
김성애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1965년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부위원장을 거쳐 1972년 위원장이 되면서 부터다. 여맹은 북한 최대의 여성단체로서 당의 여성정책과 학습을 총괄하는 핵심 기관이다. 북한 최대의 여성단체 기관장이 된 그는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우상화를 통해 남편의 신임을 얻는 한편, 반대로 김 주석의 전 부인이었던 김정숙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스탠스를 통해 김성애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들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결국 ‘적자’ 김정일의 분노와 정치력을 넘지 못한다. 김정일에 의해 기획된 ‘곁가지 정리’로 인해 김성애는 1970년대 말 사실상 숙청됐고, 한때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아들 김평일은 외국으로 내쫓긴 채 변방국 대사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권력을 잡은 뒤, 계모 김성애와 함께 권력을 꿈꿨던 친인척들과 정치인들 대다수를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독종 오빠 빼닮은 김경희 비극의 가족사
딸을 자살로 내몰았다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의 집요함과 승부욕을 가장 빼닮은 여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남편 장성택을 선택한 이는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대학 시절 만난 남편 장성택은 수려한 외모는 물론 아코디언 연주 등 음악과 가무에도 일가견이 있는 당시 김일성대 최고의 ‘킹카’였다고 한다.
김경희가 그런 그를 지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권력에 깊은 뜻을 갖고 있었던 장성택 역시 ‘공주님의 청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장성택은 성분적으로 보잘 것 없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김일성 주석은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이 연인의 감시를 당시 황장엽 김일성대 총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김경희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황장엽 당시 총장에게 되레 “총장 양반이 어디 사랑 문제에 간섭 하느냐”며 따지고 들었고, 이에 황장엽 총장은 그의 기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했다고 한다. 결국 김경희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 장성택을 잡기위해 식음을 전폐했고,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1972년 결혼 허락을 받아낸다. 천하의 김일성도 딸의 고집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든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의 독한 면까지 쏙 빼닮았었다. 이것이 그의 큰 화근이었다. 2006년, 김경희는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자신의 딸 장금송을 먼저 떠나보낸다. 사인은 자살. 그의 딸 장금송은 프랑스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김경희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장금송은 프랑스 현지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마친다. 장성택과의 결혼을 반대해 애를 먹었던 김경희.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자신의 딸의 결혼만큼은 독하게 반대했고 이 같은 비극을 낳았던 것. 이후 김경희는 한 동안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딸을 자살로 내몰았다
김정일 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함주군 동봉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합뉴스
김경희가 그런 그를 지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권력에 깊은 뜻을 갖고 있었던 장성택 역시 ‘공주님의 청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장성택은 성분적으로 보잘 것 없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김일성 주석은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이 연인의 감시를 당시 황장엽 김일성대 총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김경희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황장엽 당시 총장에게 되레 “총장 양반이 어디 사랑 문제에 간섭 하느냐”며 따지고 들었고, 이에 황장엽 총장은 그의 기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했다고 한다. 결국 김경희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 장성택을 잡기위해 식음을 전폐했고,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1972년 결혼 허락을 받아낸다. 천하의 김일성도 딸의 고집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든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의 독한 면까지 쏙 빼닮았었다. 이것이 그의 큰 화근이었다. 2006년, 김경희는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자신의 딸 장금송을 먼저 떠나보낸다. 사인은 자살. 그의 딸 장금송은 프랑스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김경희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장금송은 프랑스 현지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마친다. 장성택과의 결혼을 반대해 애를 먹었던 김경희.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자신의 딸의 결혼만큼은 독하게 반대했고 이 같은 비극을 낳았던 것. 이후 김경희는 한 동안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