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 갈등에 ‘과거’ 얽혀 뒤숭숭
▲ 이경훈(왼쪽) 현대차노조 위원장과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 | ||
지난 1일 금속노조는 신임위원장에 박유기 전 현대차 노조위원장이 당선됐다고 밝혔다. 박 당선자는 9월 28일부터 3일간 실시된 임원선거 재투표에서 조합원 14만 7618명 가운데 9만 4374명(63.93%)이 투표해 찬성률 64.11%로 임기 2년의 제6대 금속노조 위원장에 올랐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19개 지역 및 기업지부 중 유일하게 ‘친정’인 현대차노조에서 과반을 넘지 못했다. 찬성률이 49.22%에 그친 것. 이는 온건노선의 이경훈 위원장이 당선된 현대차 내부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금속노조 관계자는 분석했다. 결국 박 위원장은 자신의 친정이자 금속노조 최대 지부인 현대차노조의 동의를 받지 못한 채 첫발을 내딛게 된 셈이다.
특히 박 위원장은 당선 원천 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현대차노조는 지난 7월 20일 노조창립기념품 납품비리 사건 책임을 물어 박 위원장에 대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한 조합원 자격정지 1년’을 결정했다. 이에 박 위원장은 불복하고 재심의를 신청했고 지난 9월 초 금속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것이다.
재심의 최종결정이 내려질 때까지는 조합원 자격이 유지되기 때문에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재심 중인 사건으로 재심 권한은 금속노조가 갖고 있다”며 “현직 위원장 징계는 금속노조 전체 조합원의 찬반투표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인 노조창립기념품 납품비리 사건은 2006년 8월 불거졌다. 당시 박 위원장이 이끌던 현대차노조는 전국유통업체를 대상으로 기념품 납품업체 선정에 나섰다. L 제약이 응찰한 레저용 테이블을 최종 기념품으로 채택하고 13억 2000만 원어치인 4만 4000개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조합원들로부터 제품에 대한 불만과 선정 과정에 대한 의혹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노조는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했다.
조사 결과 L 제약이 제출한 입찰서류는 대구의 D 업체가 L 제약의 명의를 빌려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업체가 제출한 제품보증용 증권도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노조는 D 업체가 입찰 구비서류인 증권을 제출하기도 전에 1차 계약금 3억 9600만 원을 지급하고 명의 차용과 증권위조 사실을 알고도 허위서류를 제출한 이 업체와 재계약해 특혜 의혹도 받았다.
노조 내부에서 금품을 받거나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없었지만 납품업체 선정을 담당했던 노조간부 이 아무개 씨가 D 업체 대표와의 친분 때문에 특혜를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비리 사건이었지만 박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전원 총사퇴를 결정했다. 당시 지도부가 총사퇴를 하며 문제가 해결된 듯 보였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현대차노조는 확대운영위에서 박 위원장에 대해 징계를 결정한 것이다.
현대차노조 강성계파 쪽에서는 비리사건을 다시 부각시킨 이유가 박 위원장의 금속노조 위원장 출마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현대차노조 관계자는 “당시 물건 대금을 외환은행이 선지불했는데 그걸 갚지 않아 이자가 붙어 6억 원이 넘는 금액이 됐다”며 “이에 대해 당시 사업을 집행했던 박유기 위원장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징계 처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여하튼 이경훈 위원장이 이끄는 온건 성향의 현대차노조와 박유기 위원장이 이끄는 강성 금속노조의 갈등과 마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게 노동계 안팎의 관측이다. 게다가 현대차노조 내부의 노노갈등도 본격화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온건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현대차노조에서는 강성그룹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금속노조와 현대차노조가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 경우 현대차노조는 이 위원장 지지파와 박 위원장 지지파로 나뉘어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한 셈이다.
사실 박 위원장과 이 위원장의 질긴 ‘인연’은 4년 전으로 올라간다. 지난 2005년 12대 현대차노조위원장 선거 당시부터 대립하며 3차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박빙의 승부를 펼치다 결국 박 위원장이 승리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시각차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위원장은 현대차노조의 지역지부전환을 거부하며 “금속노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금속노조가 가지고 있는 교섭권·체결권·단결권을 다시 지부인 현대차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하며 뜻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금속노조 탈퇴 가능성도 내비쳤다.
반면에 박 위원장은 현대차노조를 2006년 금속노조에 편입시킨 주인공으로, 기업노조에서 지역지부로 전환해 산별노조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대차노조가 “금속노조가 관장하는 현 체제로는 개별 기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론을 펴자 박 위원장은 “규약을 바꾸기 전에는 개별노조에 대한 교섭권 위임은 불가능한 만큼 현행 규약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박 위원장은 “사업장별 노사 간에 자율적인 교섭을 통해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입각해 체결해놓은 단체협약의 근간을 법을 이용해 강제로 무너뜨리려는 행위에 대해서 결코 좌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의 지휘아래 정부의 강제입법 저지를 위해 가능한 투쟁방침을 마련해 입법저지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혀 향후 금속노조의 강경 행보를 시사했다.
한편 새 집행부를 꾸리는 현대차노조는 안으로도 뒤숭숭한 상황이다. 상임집행부 자리를 놓고 고성이 오가고 있다는 것. 상임집행부는 평균 60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이경훈 위원장이 선거 기간 동안 서로 다른 계파와 공조하며 상임집행부 자리를 약속했다고 한다. 노조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임집행부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앉히려는 계파들 간의 마찰이 발생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에 대해 이경훈 위원장 측은 “현재 상임집행위 인원은 66명으로 확정이 됐고 아직 남아있는 자리에 여러 명의 인물이 하마평에 오르면서 그러한 소문이 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