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먹칠’ 동네에선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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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월 12일 서울 서초동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열린 국내 6개 LPG 공급업체에 대한 담합에 관한 전체회의에서 업계를 대리해 나선 법무법인 관계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E1과 SK가스를 중심으로 LPG 관련 기업들은 지난 2003년부터 6년간 최소 20여 차례 만나면서 총 72회에 걸쳐 판매가격 관련 정보를 교환하며 LPG 판매가격을 담합, 최소 21조 원에 달하는 부당매출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공정위는 사상 최대 금액인 6689억 원의 과징금 부과결정을 내린 것이다.
공정위는 지난 2007년 12월 이후부터 LPG 국제가격이 하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판매가격이 높게 유지되자 수도권 충전소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SK가스의 평균 프로판 판매가격은 ㎏당 769.16원으로 LPG를 수입하는 E1의 769.17원과 0.01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부탄 판매가격도 SK가스 1162.32원, E1 1162.31원으로 0.01원 차이에 불과했다. 공정위는 “6개 회사가 정기적으로 만나며 판매가격과 관련해 정보를 교환했을 정도로 담합이 관행화됐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부과한 업체별 과징금 액수는 SK가스 1987억 원, E1 1984억 원, SK에너지 1602억 원, GS칼텍스 558억 원, S-OIL 384억 원, 현대오일뱅크 263억 원이다. 이 가운데 담합사실을 1위로 신고한 SK에너지는 과징금 1602억 원이 100% 면제되고, 두 번째로 신고한 SK가스는 1987억 원의 절반이 감면돼 993억 5000만 원을 부과 받았다.
지난해 SK가스의 시장점유율은 28.1%로 국내 1위, E1이 22.9%로 2위, SK에너지는 18.3%로 3위를 기록했다. SK그룹이 전체 46.4%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업계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업계 1위인 SK가스와 3위인 SK에너지가 리니언시 제도를 이용해 담합 사실을 자진 신고하자 나머지 업체들은 “업계 선두주자인 SK가스와 SK에너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며 분개하고 있다.
이처럼 SK가 ‘발 빠른’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SK에너지와 SK가스 실무진들이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SK에너지는 경기침체로 2분기 석유부문에서 683억 원의 영업 손실을 내 정유 사업에서 적자를 봤다. 이런 상황에서 실태조사에 들어간 공정위로부터 과징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 액수를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SK가스는 2002년에도 가격 담합으로 적발돼 16억 4100만 원의 과징금을 받은 전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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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내부에서도 자진 신고를 한 경영진의 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SK의 한 내부 관계자는 “가격 담합을 인정해 버려 기업 이미지가 실추된 데다 업계의 신뢰도 잃었다”며 “과징금을 덜 내기 위해 자진 신고를 했다가 정유업계 1위로서의 리더십과 더 많은 것을 잃을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관계자는 “행정소송을 통해 의혹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더 이득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SK가 더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공정위의 과징금 결정이 법원에서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기 때문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선고한 공정위 상대 행정소송 30건 중 11건에서 ‘공정위 결정이 잘못됐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에서 부당하다고 판단한 과징금 액수는 1521억 3300만여 원에 이른다. 기업들이 공정위가 일부 업체의 증거만 보고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다. 이번 LPG 가격 담합 건도 SK를 제외한 업체들이 행정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만큼 법원의 판결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LPG업계의 한 관계자는 “법률적 검토를 거쳐 회사 개별 혹은 집단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SK에너지 관계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단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사태로 리니언시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담합 관행을 적발하려면 리니언시가 ‘필요악’이라는 주장과 자진 신고를 했다고 시장점유율 1위 업체에 과징금을 전부 면제해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장 점유율이 높은 기업이 공정위의 집중 조사 대상이 되다보니 과징금도 가장 커 리니언시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다.
하지만 리니언시 제도를 통해 국내에서 벌어지던 여러 가지 담합 사례가 적발되기도 했다. 6년간 이어진 밀가루 담합은 2006년에 밝혀져 과징금 435억 원을 부과 받았고 14년간 지속된 설탕담합은 2007년 과징금 511억 원이 부과되기도 했다. 공정위는 리니언시 제도 논란과 관련해 현행 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담합을 주도했던 업체가 악용하는 경우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할 계획이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