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의 ‘이헌재 사단’ 쓸어내기?
▲ KB금융지주 차기 회장에 내정된 지 28일 만에 사퇴 의사를 밝힌 강정원 국민은행장. | ||
금융감독원은 지난 연말 1주일에 걸쳐 KB금융에 대해 ‘고강도 사전검사’를 벌였다. 이는 지난 14일부터 시작된 KB금융 종합검사에 앞선 사전검사였지만 보통 3~4일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는 전례와는 달리 부서장급이 사용하는 개인 컴퓨터(PC)를 12대나 통째로 가져가는 등 유례없이 강도 높은 조사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금감원은 일부 사외이사들의 비리 정황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토대로 14일부터 시작된 종합검사의 강도가 제법 높을 것으로 예고돼왔다. 사전검사에서 금감원은 강 행장의 운전기사까지 면담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 종합검사가 사외이사들의 범주를 넘어 강 행장을 겨냥할 것이란 관측을 낳기도 했다.
강 행장이 금융당국으로부터 이 같은 압박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번 종합검사의 초점은 강 행장 체제하에 이뤄진 일부 투자의 손실 배경과 강 행장의 사외이사진 장악 의혹 등에 맞춰질 태세다. 이와 관련, 강 행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검사 중이어서 말하기 부적절한 면이 있지만 투자를 잘했나 하는 것은 검사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 밝혔다.
금융권과 관가에선 금융당국과 강정원 행장이 마찰을 빚게 된 배경 중 하나로 강 행장의 KB금융 조직 장악 과정을 꼽는다. 지난 2004년 11월 국민은행장이 된 그는 2007년 재선에 성공하고 나서 초대 KB금융 회장 겸직까지 노렸지만 2008년 7월 황영기 전 회장 취임으로 그 뜻을 접어야 했다. 지난해 황 전 회장이 우리금융 회장 재직 시절 투자 손실을 이유로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은 뒤 지난 9월 KB금융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 행장이 회장 대행을 맡으면서 황 전 회장 인맥 대신 강 행장 사람들이 대거 요직에 등용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융당국이 황영기 전 회장에게 중징계를 내려 KB금융에서 나가게 만든 것이 강 행장의 회장직 무혈입성을 염두에 둔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강 행장과 더불어 새 KB금융 회장 후보 경쟁에 나섰던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과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이 모두 현 정권과 돈독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인 까닭에서다.
이 사장은 현 정권 실세인 김백준 총무비서관의 매제이며 김 전 소장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회추위에 참여하는 사외이사들 중 다수가 ‘친 강정원’ 성향 인사들이라는 점을 문제 삼으며 중도하차했다. 이후 강 행장은 지난해 12월 3일 회추위에서 KB금융 회장으로 내정됐지만 곧 사퇴했다. 지난 8일엔 차기 회장직 인선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이 같은 ‘강정원 사태’의 배후에 대해 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중 금융관료 사회를 주름잡았던 이른바 ‘이헌재 사단’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황영기 전 회장은 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선대위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 정권 출범 이후 각종 요직 후보군에 오르내리다 ‘낙하산’ 논란 속에 초대 KB금융 회장직을 꿰찼다.
이로 인해 ‘KB금융 내 황영기 인맥과 강정원 인맥이 이전투구를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황 전 회장이 낙마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다. 이렇듯 황영기-강정원 두 사람 사이엔 알력관계가 형성돼 왔지만 이들에겐 ‘이헌재 사단’ 일원이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황 전 회장은 이헌재 전 부총리가 주요 현안을 구상할 때 의논상대가 됐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강 행장은 이 전 부총리가 경제부총리직에 있을 때인 2004년 11월 국민은행장에 발탁됐으며 이후 연임에 성공해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황 전 회장이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을 당시 황 전 회장의 입지 강화에 대한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들) 세력의 견제가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나돈 바 있다. 모피아 내에서 이헌재 사단에 대한 견제심리가 커졌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모피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현 정부 세력과 황 전 회장 간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강 행장을 향한 금융당국의 강공 역시 ‘이헌재 사단 견제’ 맥락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2007년 3월~2008년 5월)의 투자 손실 책임 논란 속에 국민연금 이사장직에서 지난 9월 자진사퇴한 박해춘 전 이사장 역시 ‘한때’ 이헌재 사단 일원으로 분류됐던 인물이다.
이처럼 KB금융 회장 내정과 관련된 여러 형태의 외풍 논란이 나돌게 된 와중에 터져 나온 강 행장의 11일 기자간담회 발언내용은 금융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날 강 행장은 지난 연말 회장 내정자 선임 당시를 가리키며 “회장 선임을 연기하라는 얘기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도 “외압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이사회가 진행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물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형식이었지만 여론의 초점을 KB금융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서 KB금융 회장 선임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는지로 옮겨놓으려는 의도로 풀이되기도 했다.
강 행장의 이 같은 행보에 금융당국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금감원 내에선 “검사권에 대한 KB금융의 정면 도전”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올 정도다. 강 행장 발언이 외압설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국민은행 측은 “추정일 뿐 이사회와 행장이 당국의 요구를 직접 받은 적은 없다”는 해명자료를 배포하면서 금융당국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11일 간담회에서 강 행장은 올 10월까지로 예정된 행장 임기를 마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전임 황영기 전 회장처럼 떠밀려 나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싶진 않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금융당국의 공세를 맞이하고 있는 강 행장이 황 전 회장과 달리 임기를 지켜낼 수 있을지 온 금융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