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한 지 8개월이 채 되지 않은 대통령이 자신의 진퇴 문제가 걸린, 더구나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를 두고 “국정과 국민을 볼모로 한 무모한 도박” “쿠데타적 발상”이란 격렬한 비판이 대두됐고 “국정혼란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불가피한 결단”이란 반론도 만만찮은 상황. 특히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는 노 대통령이 재신임 결정을 내린 직접적인 계기가 자신의 ‘영원한 집사’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거액의 SK 비자금을 수뢰한 사건이었다는 점을 들어 측근비리 의혹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으로 몰아붙이며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신임 발표 이후 여론 추이와 정치 상황은 외견상 노 대통령의 ‘승부수’가 먹혀들고 있다는 평가다. 30%대, 심지어 일부 여론조사에선 10%대까지 추락한 국정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재신임’ 비율이 ‘불신임’보다 적게는 3~4%, 많게는 20% 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 그러나 재신임 찬반 양론과는 별개로 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이 기존의 국정난맥, 특히 측근들의 무차별 중용이라는 이른바 ‘안면정치’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야권은 물론 통합신당까지 청와대 참모진의 전면개편 요구 등을 통해 ‘안면정치’의 시정과 ‘측근 정리’를 촉구하고 나섰지만 당사자인 노 대통령은 “코드 인사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며 정면으로 반발해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재신임 정국을 불러온 핵심 요인으로 떠오른 ‘안면정치’ 논란의 실체를 따져 봤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결정을 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본인이 언급한 대로 최 전 비서관의 비리 의혹이다. 대선 직후 SK측으로부터 최 전 비서관이 11억원을 받은 혐의가 검찰에 의해 포착되면서 ‘측근 비리’ 의혹이 정점에 달하자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으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운영의 밑천인데 지금 최 전 비서관 문제로 적신호가 켜진 만큼 국민심판을 겸허히 받을 필요가 있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그러나 ‘책임지려는 자세’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별개로 문제를 원천적으로 발생시킨 노 대통령의 무분별한 측근 중용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최 전 비서관을 포함한 핵심측근들의 자질 시비가 일찌감치 제기됐음에도 노 대통령이 이를 외면했고, 나아가 권력핵심부에서 이들의 비리 의혹에 대해 지나치게 온정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 문제로 대두됐다.
노 대통령 측근들에 따르면 최 전 비서관은 지난 대선 당시 부산선대위 회계책임자를 맡을 때부터 구설이 잦았던 인물. 돈을 만지는 회계책임자의 특성상 투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에도 선대위 내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할 만큼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선대위 출신의 한 핵심 인사는 “후원금 모금 과정에서 최 전 비서관을 둘러싼 각종 문제 때문에 논란이 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조성래 변호사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등 선대위 지도부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과 최 전 비서관의 관계와 현실적으로 최 전 비서관을 제외하곤 회계업무를 맡을 사람이 없어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최 전 비서관을 둘러싼 ‘잡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청와대 살림을 맡겼다는 점. 아무리 20년 넘게 자신의 변호사 사무장, 지구당 사무국장을 맡아 왔던 최측근이라지만 공직을 맡을 만한 도덕성과 자질을 갖췄는지를 따지지 않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란 핵심요직에 기용한 것이 작금의 ‘화’(禍)를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은 “대선이 끝난 후 노 대통령은 물론 주변 참모들이 국정 ‘라인업’을 짜면서 온정주의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최 전 비서관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지금와 생각하면 후회천만한 일”이라고 토로했다.
‘부산인맥’의 주축인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1비서관도 이번 최 전 비서관 사건으로 인해 데미지를 입어 ‘안면정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노 대통령은 권력 핵심부의 부패를 막는 ‘소금’ 역할인 사정업무를 그 스스로 ‘정신적-영혼적 관계’라고 밝힌 문 수석, 이 비서관에 맡겼지만 결과는 두 사람 역시 최 전 비서관 사건에서 보듯 온정주의에 치우쳐 제 역할을 못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정원-검찰 등 권력기관 개혁에 나름대로 성과를 거둬 온 두 사람 역시 ‘자질론’ 시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다.
이광재 상황실장을 축으로 한 386측근들의 청와대 대거 포진과 이들을 둘러싼 논란도 노 대통령의 ‘미스캐스팅’(Miscasting)으로 거론되고 있는 형편. 특히 노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 속에 ‘핵심실세’로 평가받아온 이 실장의 경우 그동안 몸을 낮추어 극도의 조심스런 행보를 해왔지만, 최근 들어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썬앤문 금품수수 의혹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실정이다.
그는 최근 자신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주어진 책임과 무게에 못미친 것 아닌가 싶다. 이런 게 충분히 예측돼서 (청와대에) 안 들어오려고 했다. 상황실장도 안하려 했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다른 386 참모들의 자괴감도 갈수록 커져 한 인사는 “애초에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가졌던 프라이드가 이제는 온데간데 없고 ‘일도 못하는 젊은 놈이 건방지기만 하다’는 욕만 실컷 먹었다. 연말 청와대 개편 때 무조건 나갈 생각”이라고 토로했다.
각료 인선에서도 노 대통령의 ‘안면정치’는 시비의 대상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8개월여 남짓 해수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을 대거 중용한 것을 빗대 “현 정부의 코드는 ‘노무현 눈도장’”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란의 대표적인 예가 취임 14일 만에 잇단 ‘설화’로 낙마한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임명 과정. 노 대통령이 해수부 장관 시절 ‘눈에 든’ 관료였던 최 전 장관은 현 정부 출범 후 정부부처 최연소 차관으로 발탁된 지 6개월 만에 다시 장관으로 승진해 배경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아울러 최 전 장관과 바통 터치한 허성관 장관이 핵심요직인 행자부 장관으로 옮겨간 것도 ‘해수부 전성시대’ 논란의 메뉴가 됐다. 또 이미 관료생활에서 물러나 산하기관장으로 가 있던 K씨를 해양부 차관으로 발탁한 것도 ‘노무현 장관’ 시절의 특수관계가 배경이란 뒷말이 나돌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 후 입각한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도 노 대통령이 해양부 장관 시절 맺었던 인연이 승진가도를 달리게 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행시 13회인 두 사람은 각각 재경부 세제실장과 예산처 예산실장으로 재직중이던 2001년 2~3월께 당시 노 장관이 차관으로 데려오려 공을 들였던 인물들. 그러나 김 부총리의 경우 행시 기수에 비해 너무 빨리 ‘경제 수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행시 고참들이 장관으로 줄비한 다른 부처와의 정책협의에서 장악력을 행사하지 못해 관료사회에서 ‘미스캐스팅’ 비판이 일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