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서 멸치 다듬어 봤수? 안해 봤음 말을 말어~
▲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 사진제공=MBC | ||
소규모 유통회사에 입사한 경험이 있는 D 씨(여·28)도 신입시절 황당한 지시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생긴 지는 제법 오래된 곳이었는데 내근 직원은 거의 없었어요. 파트별로 다 있지만 거의 외근 중이라는 말에 그런가보다 하고 일을 시작했죠. 사장은 자리에 없을 때가 많았고 집이 근처인 사장 부인이 거의 상주하고 있었어요. 작은 사무실이라 밥도 직접 해먹을 때가 많았는데 입사하자마자 사장 부인이 ‘처음이라 내가 해주는 거다’라고 해서 어리둥절했죠. 밥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음날 멸치 한 봉지를 사오더니 같이 다듬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멸치 내장을 빼면서 앉아 있자니 내가 너무 한심한 거예요. 이건 아니다. 차라리 실력을 더 키워서 큰 회사에 가자고 생각하고 다음날 바로 그만뒀습니다.”
여직원들은 신입만큼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에 시달린다. 크게 항의하기도 뭣한 자잘한 심부름들 때문에 짜증은 나지만 싫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설회사에서 경리 업무를 맡고 있는 A 씨(여·26)는 입사 전의 예상과 다른 회사 생활이 속상하단다.
“입사할 때 상사가 여기 식모 살러 온 거 아니니 맡은 일 잘하고 발전하는 모습 보여 달라고 해서 나름 꿈도 많았죠.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식모살이와 다를 바 없었어요. 뭐 카피(복사) 커피 콜(전화)을 줄여 ‘3C’라고, 여직원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말이 있는 건 알지만 그 정도 잡무는 애교예요.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상사들의 개인적인 지시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요. 은행에 개인적인 돈 입금하고 뽑아오라는 건 예사고, 보험 관련 팩스에서 자녀의 등록금고지서까지 출력해 줘야 하죠. 한 번은 자동차 키를 주면서 차에서 담배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정말 서글프더군요.”
A 씨는 상사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으레 호출을 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이제 와서 거부의사를 밝히자니 그것도 어렵다. 그는 “개인비서를 대하듯 심부름을 당연히 여기는 얼굴 두꺼운 상사 때문에 회사 가는 게 싫을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29)도 상사의 어이없는 업무지시를 받아 당황스러웠다.
“마흔이 넘은 상사가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뭐, 늦은 나이에 열심히 하려는 모습까지는 보기 좋았죠. 그런데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본색을 드러내더라고요. 평소 제가 호주에 2년간 다녀온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분이었는데 한번은 슬쩍 A4용지 한 장 정도의 종이를 주면서 시험에 나오는 건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러니 번역 좀 부탁한다고 했어요. 양도 얼마 안 되고 또 급해 보여서 업무시간 쪼개 틈틈이 도와드렸죠. 그게 화근이었어요. 그 다음부터 양이 조금씩 많아지더니 급기야 대학원 팀 프로젝트를 하는데 맡은 거라면서 20장도 넘는 분량의 해석을 맡기는 거예요. 매번 메신저로 살짝 불러내 지시를 하는데 심지어 그것 때문에 야근을 한 적도 있어요.”
남자직원들은 또 남자라서 떠맡아야 하는 사적인 심부름이 있다. 주로 힘쓰는 일이나 자동차와 관련된 것들이다. 얼마 전 한 구청직원이 7년간 구청장의 개인 차량을 세차한 사실이 드러나 인터넷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음향기기 관련 일을 하는 H 씨(30)는 그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직속상사의 차 관리는 그냥 전부 제 몫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주차는 물론이고 회식이나 접대자리는 항상 저를 대동하죠. 마치 개인 운전기사가 된 기분이에요. 자동차 기름 넣는 것까지 시키는데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시키는 것도 당당해지더라고요. 이제 그 구청직원처럼 세차하는 일만 남은 것 같네요.”
H 씨는 매번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농담처럼 웃고 넘어가지만 정색을 하며 싫은 티를 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는 “좀 지나치다 싶을 때는 확실히 거부의사를 밝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지시가 공적인 지시로 둔갑한다”고 충고했다. 꿀 같은 휴일, 힘쓰러 상사의 집에 가야 하는 남자 직원들도 꽤 많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S 씨(31)는 두 번이나 직장 상사의 이사 현장에 가야 했다.
“주말은 정말 직장인들에게 소중한 시간이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에서 미안한 기색 없이 말할 때는 너무 얄밉죠. 부탁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처럼 얘기하는데 약속 있다는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대학 동기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경험이 꽤 많더라고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삿짐센터 직원 더 부르는 그 비용 아껴서 부자 됐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직장생활 5년 차인 M 씨(35)는 “거절 후 껄끄러운 관계가 될까봐 울며겨자먹기로 심부름 하는 것이 부하직원의 입장인데 이걸 잘 알면서도 지시를 하는 것은 상사의 소양 문제”라면서 “부하직원은 몸종이 아닌 동료라는 사실을, 상사가 되면 제일 먼저 잊게 되는 게 현실인 듯싶다”라고 꼬집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