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법질서’? 청문회 안하는 게 다행일걸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청와대에서 김기춘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한 여권 관계자는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에 대해 이렇게 총평했다. 청와대 인선 발표 당시 대부분의 여권 인사들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깜짝 복귀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참모진 교체가 너무 이른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반응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나올 사람이 나온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김 비서실장은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고 공직에 있으면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가 초원복집 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며 재야에 머물 당시 정장을 하고 서재로 출근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도 책읽기를 무척 즐기지 않나. 김 비서실장의 평창동 자택과 박 대통령 삼성동 자택에 가본 사람들은 가장 눈에 띄는 게 서재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김 비서실장은 국회의원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독일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이수혁 주 독일대사가 쓴 <통일 독일과의 대화> 등을 탐독하고 이야기를 나눴을 정도라고 한다.
여권 인사들은 김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된 최초 계기에 대해 고 육영수 여사를 쏜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을 때라고 입을 모은다. 이 과정에서도 책이 등장한다. 체포 이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문세광을 심문하게 된 김 비서실장은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고는 대뜸 “너 프랑스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지?”라고 물었다. 문세광의 범행 동기나 권총을 숨긴 방식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그것과 꼭 닮아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예기치 않은 질문에 문세광은 “검사 선생도 그 책을 읽으셨느냐”고 반문한 뒤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 비서실장이 이번에 중용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인사청문 대상이 아닌 자리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인사청문회를 준비해 본 민주당 보좌진들은 김 비서실장이 “너무 잘 산다”고 입을 모았다. 21세에 해군법무관을 시작으로 검사, 검찰총장, 법무장관, 국회의원, 공익재단 이사장 등 대부분 공직자의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 비서실장이 국회의원으로서 마지막 해를 보낸 2008년 신고한 재산은 총 42억 4707만 원. 서울 평창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이 13억 4600만여 원, 예금액이 20억 4500만여 원, 그리고 골프회원권 4개와 콘도미니엄 회원권 2개, 헬스클럽 회원권을 합해 12억 5700만여 원을 신고했다. 인사청문회가 열렸다면 야권에선 서민과 동떨어진 전형적 엘리트 관료라는 점을 부각시켰을 것이다.
민주당의 한 베테랑 보좌관은 “김 비서실장이 지금 있는 청와대 참모들과 잘 어우러질지도 의문이다. 청와대 안에서는 벌써부터 ‘부자인 왕 비서실장이 가난한 왕 수석(이정현 홍보수석을 지칭하는 것으로 청와대 차관급 고위인사 가운데 재산이 가장 적음)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겠느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고 전했다.
김 비서실장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 출마 때 한 차례 재산축소신고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가 신고한 재산은 24억 3300만여 원이었는데, 상대 후보 측에서 “김 후보가 자신의 평창동 자택을 1억 931만 원으로 신고했는데 2003년 공시가격으로만 계산해도 6억 288만 원에 달해 4억 원 이상을 축소 신고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김 비서실장은 “사무실 여직원이 1㎡를 1평으로 착각해서 벌어진 일”이라 해명해 일단락됐다.
2004년 헌법재판소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 원본을 제출하는 당시 김기춘 국회법사위원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재산 이외에도 의혹이 적지 않다. 2004년 총선 당시 시민단체에서는 김기춘 후보에 대해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낙선 운동을 벌였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김기춘 후보는 유신헌법 제정 당시 법무부 과장으로,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유신헌법 핵심 조항이 담긴 초안을 작성함 △1989년 서경원 밀입북 사건 당시 검찰 수사라인의 최종책임자로서 재수사시 환전표 등 일부 물증과 진술을 누락함 △14대 대선에서 초원복집에서 열린 부산지역기관장 비밀회동에 참여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함 △지역구인 거제에서 워크아웃 상태인 대우조선이 제공한 15인승 헬기를 이용해 낚시를 즐겼고, 당시 동행한 대우중공업 사장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중 제일 화제로 삼을 사안은 1992년 12월 초원복집 사건. 당시 김 비서실장의 ‘문제적 발언’을 간추려 보자면 이렇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고, 접대를 좀 해 달라. 당신들이야 지역발전을 위해서이니.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부산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면 어떠냐 정주영이면 어떠냐 이러면 영도다리 빠져 죽자.”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 긍정적.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 일으켜야 돼.” “학벌을 보나 뭘 보나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찍어야 되지 않겠어?” “공화당 때도 우리가 다 써주고 도와줬지.”
물론 당시 김 비서실장이 법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자연인 신분이었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실제로 김 비서실장은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해당 사건을 통해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 금지)에 관한 위헌 결정마저 이끌어냈다.
야권 관계자는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탁월하다. 초원복집 사건 이후 김 비서실장은 대선 승리 숨은 공신으로 인정받아 문민정부 당시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로 슬그머니 복귀해 이듬해 YS의 고향인 거제에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 감각이 남다른 인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2004년 12월 16대 법사위위원장이었던 김기춘 의원이 17대 법사위 점거 의원총회에서 위원장 자리에 앉아보며 감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당시 상황에 대한 몇몇 보도에 따르면, 김 비서실장은 언론사별로 선물 등급을 나누기도 했다. 주요 매체 기자에게는 ‘발렌타인 30년산’이나 ‘로얄 살루트 21년산’을 보내고 그 밑에는 ‘시바스 리갈’이나 와인을, 더 밑 등급 기자들에게는 10만 원짜리 인삼 세트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의 전직 비서관은 “초원복집 사건 당시 녹취록 전문을 실으며 보도했던 몇몇 매체는 그마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김 비서실장은 ‘미스터 법질서’로 부르는 게 너무 우습지 않나. ‘육법당의 리더’가 더 맞는 표현”이라고 전했다.
병역 문제도 피할 수 없는 검증 소재다. 김 비서실장은 해군법무관, 대위로 전역한 만큼 병역 문제에 있어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김 아무개 씨는 수핵탈출증(허리디스크의 일종)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한 민주당 당직자는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병역비리의혹이 불거졌을 때 정치권에서 함께 검증해야 할 국회의원 명단에 김기춘 비서실장 아들 역시 포함돼 있었다”며 “김 비서실장의 아들이 현직 의사다. 면제 과정에서 결정적 하자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정홍원 국무총리 아들도 같은 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정도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안”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민주당 보좌관은 “인사청문회가 열린다면 야권에서 집중 추궁해야 하는 것은 초원복집 사건이 아닌 7인회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초원복집 사건은 오래됐고 YS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7인회는 박근혜 대통령과 직결돼 있고 여전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인회를 필두로 박근혜 대통령을 움직이는 숨은 권력에 대해서는 여권 인사들마저 궁금해 하는 대목이다. 새누리당 한 중진 의원은 “7인회라고 해 봐야 2007년 대선경선 때나 잠깐 있었던 것이지, 지금 무슨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아니다”라면서도 “더 경계할 것은 7인회 외 인물들이다.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나 지금 새마을 전도사를 자처하며 전국을 누비고 있는 최외출 영남대 교수 등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이런 분들이다. 김 비서실장이 이런 분들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느냐가 더욱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