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봄 북한산 산행에 나섰던 김현철씨가 나 무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 모습. | ||
현철씨가 이른바 한보사태의 여파로 옥살이를 하다 풀려난 뒤부터 최근까지 틈틈이 써놓은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두 권의 책 가운데 특히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전 에세이집. 책 속에는 현철씨가 야당 정치지도자와 대통령의 아들로서 겪었던 갖가지 에피소드와 뒷이야기가 담겨 있다. 최형우 전 의원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등 정가 인물들에 대한 평이나 일화도 눈길을 끈다. 현철씨는 책 속에서 문민정부 당시 이회창 총리의 경질 사유에 대해 ‘이회창씨로 인해 국가 안보 등 국가 주요 정책 결정과정과 보고체계에 혼선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밝혀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현철씨 자신과 아버지 YS를 위한 적극적인 ‘항변서’의 성격도 띠고 있다. 현철씨는 그간 자신을 둘러싸고 나돌았던 각종 설과 사건의 진상에 대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항변을 펴고 있다. 과거에 펴냈던 에세이집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와는 달리 현철씨 스스로 ‘너무 감정을 쏟아 넣었지 않았을까’ 경계할 정도로 격정적인 대목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한보 청문회 당시 출석을 끝까지 거부하려던 현철씨를 증인석으로 돌려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아버지 YS. 현철씨는 이때만큼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고 솔직하게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현철씨는 “지나온 삶의 궤적에 대한 아쉬움을 털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기 위해 이 책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김영삼 총재의 둘째 아들이나 대통령의 영식으로서가 아니라 김현철이라는 한 자연인으로서 일생을 일궈나가려 한다”며 “이것이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바란다”는 글로 끝을 맺었다. 현철씨 자전 에세이집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옮겼다.
86년 8월 미국에서 MBA를 마친 뒤 87년 5월 인사를 겸해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이 일시 귀국이 영구 귀국이 되고 말았다. 국내상황이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87년 5월은 대폭발의 전야, 바로 그것이었다. 민주화냐 독재냐의 갈림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훌쩍 유학길을 떠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아내를 설득하고 아버지에게 곁에서 모시겠노라는 말씀을 드렸다. ‘견딜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은 한편으론 대견해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와 걱정이 크신 그런 모습이었다. 사실상 내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내가 “아니오”라고 했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라고 했다.
내가 맨 먼저 한 일은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제 아버님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으므로 한국에서의 내 생활을 먼저 해결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MBA를 취득했으니 내 처지와 상황이 좀 특수하기는 해도 웬만하면 취직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딴에는 신중을 기한다고 국내 기업쪽에는 원서를 넣지 않고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금융기관쪽에 원서를 넣고 면접도 치렀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데가 체이스맨하탄 은행이었다.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체이스맨하탄 은행의 한국지사 부사장이 연락을 해왔다.“체이스맨하탄 은행도 한국정부 당국의 인가를 받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우리도 장사를 해야 하는 만큼 난처한 일은 피하고 싶다. 당신이 잘 이해해주길 바란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막막했다. 기왕 이런 여건이라면 아무 데나 부딪쳐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쌍용증권에 공채로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원서에는 모두 사실로 기재했지만 부친 성명란만은 다르게 썼다. ‘김홍삼’. 할아버지 함자와 아버지 함자에서 한 자씩 따서 썼던 것이다. 물론 최종인터뷰에서 드러나긴 했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회사측에서는 나의 채용 문제를 놓고 그룹 차원에서 논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된 나의 직장생활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87년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지난 97년 한보청문회에 출석한 현철씨가 허공을 응시한 채 상념에 잠겨 있다. | ||
급기야는 가까운 친구들도 저녁마다 모이면 내게 그런 이야기들을 전했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런 생각들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김대중씨가 양보하는 것이 순리”라는 얘기로 시작되곤 했지만 나중엔 “아버님이 양보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러다 모두 다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내겐 아버님께 말씀드리라는 은근한 압력으로 들렸다. 그들의 얘기가 아니라도 나는 속이 탔다. 여러 날의 고민 끝에 나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저‥. 후보 단일화는 시대의 요청입니다. 저쪽이 고집을 부리면 아버님이 양보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지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시다가는 두 분 다 역사에 오점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한동안 침묵하시던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김대중씨가 된다면 나도 양보한다. 1971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건 없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내가 양보해도 안 될 것이다. 저들이 누군데 그렇게 쉽게 정권을 내놓겠느냐. 그것도 김대중씨에게‥·“ 아무리 설득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도 답답하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예감했음에도 역시 대통령 선거 패배의 충격은 컸다. 아버님은 총재직에서 물러나시는 걸로 사죄하셨다. 아버님의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패배를 극복하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하겠다고. 나는 아버지를 돕는 것을 내 두 번째 직업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뒤 아버지는 감사원장 자리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감사원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그 만큼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이회창씨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나에게까지 이런저런 얘기가 들어올 정도였다. “이미지는 좋은데 실무능력은 잘 모르겠다”에서 심지어 “결국은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 사람”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얘기를 하자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금기를 깨고 시중에 나도는 얘기를 아버지께 전해드렸다. 하지만 아버님의 태도는 예상대로였다.
“사람이 너무 곧으니 그런저런 소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일 것 없다.” 아버님은 이회창씨를 감사원장으로 임명하시면서 ‘성역없는 감사’를 특별히 강조하셨고 ‘필요하면 청와대도 감사하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야말로 감사원과 이회창씨의 위상이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이회창씨의 정치 입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는 이회창씨의 총리 임명과 당 대표 임명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회창씨는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문민정부의 개혁에 가장 책임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또 그 성과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이회창씨는 감사원장으로서 전력을 다했지만 한계를 드러냈다. 파헤치기는 하는데 수습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를 못했던 것. 그런 이회창씨를 다시 국무총리로 기용하셨다. 그의 총리 임명을 둘러싸고는 감사원장 때보다 더 많은 반대의견이 제기되었다. ‘국정을 총괄하고 각 부처간의 입장을 조율하는 국무총리 자리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정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했던 아버지는 이런 반대에도 이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그의 총리 기용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은 불과 6개월도 안돼 현실로 드러났다. 거듭된 실책으로 인해 이회창씨가 총리직을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물러나는 과정에서 아버님과 이회창씨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여기서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회창씨의 경질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회창씨로 인해 국가 안보 등 국가 주요 정책 결정과정과 보고 체계에 혼선이 발생했던 때문이었다는 점만 밝혀두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씨는 그 후 당 대표로 등용되고 마침내는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까지 선출되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그가 당 대표로 등용되는 과정에서 나는 두어 번 그를 만났다. 개혁 공천을 통한 정치권 개혁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던 것. 당시 그는 “대통령께 다시 누를 끼치지 않겠는가”하는 매우 조심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그런 분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이 아버님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어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서재에서의 망중한. | ||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사람들은 막연한 추측과 소문만으로 나의 역할을 과대포장했고 또 그것이 사실인 양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나는 매우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공천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만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대선 때 아버지의 당선을 위해 표를 구하러 다녔던 때와는 완전히 역전된 형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표’를 구하러 찾아왔다. 답답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줄 ‘표’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인데 그들은 막무가내로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갔다.
97년 3월 어느 날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난데없는 전화를 받았다. 뉴스를 봤느냐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전화를 끊고 뉴스를 틀었더니 내 문제로 난리였다. 내가 박경식씨의 병원에서 전화 통화하는 장면을 몰래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뉴스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내 얼굴이긴 한데 나도 그게 무언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저 얼떨떨했다. “내가 왜 저기 나와 있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다.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YTN 사장 인사문제를 가지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상황임은 분명했다. 꽤 오래 된 일이었지만 YTN 사장 인사문제로 부처간에 약간 혼선이 생겨 누군가가 나에게 얘기를 했고 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안이다 싶어 의견을 전해준 적이 있었다. 워낙 오다가다 지나치듯이 했던 얘기라 별 생각없이 전화로 잠깐 했던 것인데 그것이 비밀리에 녹화되어 폭로되었던 것이다.
처음의 어처구니없는 심정은 점차 분노로 바뀌어갔다. 그건 불법이었다. 아니 불법 이전에 도의적인 문제였다. 어떻게 자신의 병원에 온 환자를 불법촬영한 필름을 방송에 내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박경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전화 통화 모습을 온 국민이 보게 되었고 그것은 곧바로 내가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에 관여해 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야당은 즉각 나의 국정개입에 대한 사법처리와 ‘김현철 청문회’를 요구해왔다. 한보사건도 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축소수사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었는지 검찰도 재조사에 착수하였다.
나는 애초부터 한보 청문회에 출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선 나는 한보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또 이미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혐의 없음을 인정받은 터였다. 따라서 정 문제가 되면 다시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 받았지 한보 청문회에 나가 증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야당이나 언론의 주장은 ‘당신이 정 그렇게 깨끗하면 청문회를 피할 이유가 무엇이냐. 나와서 결백을 입증해보라’는 것이었다. ‘죄가 없으면 스스로 입증해보라’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인가. 그러나 어쨌든 저들의 공세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었다. 논리와 논리의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와 소문들을 유포시켰고 그것은 곧바로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나는 저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저들이 만들어놓은 국민적 분노와 싸워야 했다. 그것은 싸우면 싸울수록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는 모래함정과 같은 것이었다.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이 뭐라 해도 귀 막고 눈 감고 버텼어야 했다. 그랬어야 최소한의 인간적인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한보청문회의 증인석에 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만은 아버님이 원망스러웠다. 아버님이 한 말씀만 안 하셨더라도 버텼을 텐데.
“나는 자네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되지 않느냐.” 그러니 청문회에 나가란 말씀이셨다. 내가 나가야 청문회가 성립되고 그래야 여야간 합의가 이뤄져 교착 정국이 풀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다. 아버님께까지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송영철 기자 s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