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에 ‘쩐’ 몇배 더 풀린다
인쇄업자들은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면 선거 인쇄물 물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익명을 요구한 베테랑 정치광고업자가 최근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분명 후보자에겐 당선이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과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선거판이기도 하다. 선거판에 뛰어들려면 적든 많든 반드시 돈을 써야 한다. 선거판에선 작은 명함 하나서부터 고가의 유세차량까지 모두 돈이다. 정치의 중심지 여의도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렇게 선거판에 풀리는 ‘쩐’을 따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수많은 정치업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정치업자들에게 최근 노다지의 꿈을 부풀게 한 핫이슈가 있으니, 바로 내년 지방선거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다. 아직까지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정치업자들은 현재 정당공천제 폐지가 결정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업자들이 그것을 그토록 고대하는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폐지될 경우, 무엇보다 기초의원 선거에 뛰어들 후보자들의 장벽이 그만큼 낮아진다. 그 이전에는 무소속을 제외한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이 예비후보 등록 후 정당 공천 심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정당 공천 지원자들의 경우 대개 5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으며 결국 이 치열한 예선전을 거쳐 선택받은 소수의 후보자들만 본선격인 기초의원 선거에 나섰던 것. 이 때문에 애초 예비후보에 등록했던 대다수의 후보자들은 선거 레이스를 끝까지 펼쳐보지도 못하고 낙오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정당공천제가 폐지된다면, 정당 공천 심사라는 예선전은 거치지 않아도 된다. 정치신인들에겐 커다란 장벽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셈. 그렇게 되면 예비후보 등록한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국 이기든 지든 선거판 레이스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선거판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준비한 돈은 다 쓴다는 얘기다. 자연스레 선거판에 풀리는 돈은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선거판 시장규모를 경제학적, 과학적 측면에서 분석해 놓은 경우는 거의 없다. 업계 내부에 따르면 공직선거법 시행 이래 대략적인 선거비용 추산은 가능하지만 여론조사 비용을 포함해 여전히 암묵적으로 지출되는 비공식 비용은 추산조차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정 기간에만 발생하는 한시적 시장인 데다 다른 산업에 비해 규모 자체도 크지 않은 탓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 대부분은 언론, 학계 등이 업계 내부 동향에 따라 조악하게 분석한 시장규모뿐이다.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가 폐지되면 후보 경쟁률은 평균 5 대 1 수준에서 15 대 1까지 불어날 수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정치컨설턴트 이재관 마레컴 대표는 “정당공천제가 폐지될 경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초의원 선거규모가 두세 배 규모로 확장된다”면서 “그러면 자연스레 기초의원 선거시장만 1조 원대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지방선거는 1년여가 남았지만, 벌써부터 정당공천제 폐지를 염두에 두고 기초의원직 선거판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문의가 오기도 한다”며 “업계 역시 이러한 고객들을 선점하기 위해 이미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며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정당공천제 폐지라는 이슈를 맞아 업계가 이미 뜨거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내년 기초의원 선거 시장규모가 확대될 경우, 그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 선거비용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선거 인쇄물 물량은 시장규모 확대에 비례해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전국 인쇄업자들의 기대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세차 대여 업체들도 내년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에 따라 물동량을 조절할 계획이라고 한다. 선거비용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선거 운동원 알선 인력업체들도 이미 내년 지방선거를 내다보고 있는 중. 이밖에도 이를 종합적으로 코디해 주는 선거기획사들 역시 이미 전국을 누비며 설명회를 진행 중이다.
이밖에도 또 하나의 블루오션이 바로 선거 여론조사 업체들이다. 정치여론조사를 주로 하는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조원씨앤아이 대표는 “여론조사는 기본적으로 정치자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며 “후보들 개인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상정하기 어렵지만, 분명 정당공천제가 폐지될 경우 이 시장 역시 확대될 것이다. 솔직히 우리 역시 이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확대에는 부작용 역시 따를 수밖에 없다. 김대진 대표는 “실상 고객인 후보자들에게 적절하고 일정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업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매 선거기간마다 검증되지 않은 업체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선거가 끝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됐다”며 “시장이 확대된다면 싼값으로 무장한 이러한 업체들, 그리고 업자들이 비례해 더 많이 뛰어들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검증받은 기존 업체들에게 돌아갈 몫은 적어질 수밖에 없고 한몫 챙기려는 한철장사 업체들 때문에 피해자만 많이 양산될 수도 있다. 이점은 분명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10월 정기국회에서 결정될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에 따라 노다지를 꿈꾸는 정치업자들은 희비가 엇갈릴 전망이다. 지방선거는 아직 적잖은 시간이 남았지만, 정치업계 전반이 뜨거워진 이유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