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핵심라인 작품? 냄새 난다
진영 장관의 사의 표명을 두고 여권 내 파워게임이 벌어졌다는 관측이 돌고 있다. 사진은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박근혜 당선인이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인수위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은 9월 26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박 대통령 사과는 정부 출범 이후 4월 인사 파동, 5월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에 이어 세 번째다. 이에 대해 야권은 “공약을 지키라”며 일제히 공세에 나섰고 여권은 “어쩔 수 없었다”며 진화에 나선 상황이어서 향후 여야 간에 거센 격돌이 예상된다.
진영 장관은 정치권을 강타한 이번 복지공약 축소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진 장관은 지난해 새누리당 정책위의장과 올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면서 기초연금 공약의 세부안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또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진 장관이 주목받았던 것은 뜬금없이 불거진 사의설 때문이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던 9월 22일 몇몇 언론은 진 장관 측 말을 인용해 “(진 장관이) 기초연금 공약 미 이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히기로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보도했다.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진 장관의 사의 표명 소식에 여권에선 그 진위 파악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사의설로 인해 여권이 뒤숭숭할 당시 정작 당사자인 진 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장 중이었다. 사의 표명 보도 직후 진 장관과 통화를 했다는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진 장관이 9월 25일 귀국하는 대로 사의를 표명할 것이라고 했다. 언론 보도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했다”며 “진 장관이 출국 전 청와대에 직간접적으로 그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진 장관 사의설에 대해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일축하면서도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장관이 해외 출장 중 측근을 통해 사의를 언론에 흘렸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인사권자인 대통령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 일”이라면서 “더군다나 진 장관은 박 대통령의 측근이라고 불리는 사람 아니냐”고 반문했다.
청와대 반발 기류가 감지됐지만 진 장관은 사퇴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진 장관은 25일 귀국 직후 기자들에게 “공약 축소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얘기는 와전된 것”이라면서도 “복지부 장관으로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사퇴하는 것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도리이고 책임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나려는 이유는 오해가 있었지만 사퇴 결심만큼은 유효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다.
진 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기자들과 만나 “복지부 장관으로서 열심히 해 보려 했는데 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꼈다”며 “예산은 기획재정부가 꽉 쥐고 있고, 인원은 안전행정부가 꽉 쥐고 있고, 복지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소연한 바 있다.
그러자 정부가 진 장관 사퇴를 만류하고 나섰다. 복지공약 축소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주무부처 장관이 그만둘 경우 사태 수습이 힘들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진 장관을 집무실로 불러 “해외 순방 중 사퇴 얘기가 나온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에 진 장관은 “업무 피로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아 그만두겠다는 말을 주변에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사의 표명에 대해 숙고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실 관계자는 “정 총리가 진 장관을 질책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안다”며 “오히려 정 총리가 진 장관을 (사의 뜻을 접도록) 설득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밝혔다.
정 총리와 면담 이후 진 장관은 한 발 물러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조만간 사퇴를 강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뤘다. 평소 말이 없고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한 진 장관이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사의를 표명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진 장관과 가까운 한 여권 인사는 “(진 장관은) 말과 행동을 하기 전 수백 번 생각하는 사람이다. 절차상 다소 문제가 있는 일을 벌였다면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진 장관은 9월 27일 직접 사퇴의 뜻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실세 장관이 업무 추진 과정에서의 무력감 때문에 그만둔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진 장관이 해외 순방 기간 중 측근을 통해 사의를 표명한 것을 두고 뭔가 정치적인 사연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일각에선 진 장관이 내년 서울시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핵심 쟁점사항이 될 것이 빤한 복지공약 축소 문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면 진 장관으로선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생기는 셈이다. 이를 진 장관도 모를 리 없다. 여권 내에선 진 장관 사의 표명과 관련해 청와대 몇몇 참모들과의 권력 다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진 장관이 자신을 ‘찍어 내려는’ 라인과 갈등을 벌이다 용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진 장관은 지인들에게 “(청와대) 특정 세력이 내가 하는 일에 협조를 안 하고 사사건건 방해한다. 그들이 박 대통령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며 불만을 털어놨다는 후문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은 당초 복지공약 발표 이후 진 장관이 물러나는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약 축소에 따른 책임을 지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여기엔 진 장관에 대한 청와대 내 비토 기류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청와대의 또 다른 관계자는 “박 대통령도 인정했지만 상황이 바뀌면 공약도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공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방안을 냈는지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았고, 이 부분에 대해선 당연히 진 장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진 장관이 정부 발표 전 ‘선수’를 치면서 이러한 시나리오엔 차질이 빚어졌고,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게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들 전언이다.
진 장관은 청와대의 이러한 움직임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진 장관은 기초노령연금 준비 과정에서부터 청와대 몇몇 참모들과 불협화음을 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진 장관 측 여권 인사는 “진 장관은 막상 부처에 오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수차례 호소했다. 그런데 청와대 쪽에서 자꾸 밀어붙이려고만 하니 부딪혔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진 장관 탓으로 하니깐 진 장관도 열을 받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진 장관이 절차적인 면에서 실수한 것은 분명하다. 또 이런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장관이 책임지는 것도 맞다”면서 “정치인 장관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자기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진 장관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