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당선자의 장남 건호씨는 인터뷰에서 가 족과 신부에 관한 얘기를 털어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아버지가) 당선되면…. 가족들에게도 경호원이 따라다니겠지요?”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던 터라 마땅한 대답을 못찾고 있던 차에 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출근길까지 경호원이 함께 오면…, 아무래도 정상적인 회사생활은 어렵지 않을까요.” 입사 6개월차의 대기업 신입사원, 결혼을 사흘 앞둔 예비신랑, 그리고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 건호씨는 지금 하얀 출발선 앞에 서 있다.
가슴에 세 개의 명찰을 달고, 지금부터 달리기를 시작해야 한다. 가슴에서 ‘철렁거릴’ 세 개의 명찰은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얹힌 짐이기도 하다. 남들 같으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맞이할 새 신부와 첫 직장 생활. 하지만 예비 대통령의 아들로서 출발선 앞에 선 그의 속내는 남다른 것 같았다.
지난 22일 저녁 7시 무렵, 여의도의 한 호프집. 건호씨는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뭉치의 청첩장이 놓여있었다. “어, 그래. 그거면 되겠지? 안된다고? 그냥 그 정도에 맞춰서 친한 사람들에게 돌려 줘.” 건호씨는 21일 경남 김해의 처가에 함을 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갖는 첫 가족회의가 있었다. 22일 서울에 도착한 건호씨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곳에 달려와야 했다. 바로 청첩장 배달 때문. 그는 호출을 받고 달려 온 후배들에게 맥주 한 잔씩을 건네며 대학 은사, 선후배, 친구 등에게 보낼 청첩장 ‘배달 심부름’을 부탁하고 있었다.
“그래, 부탁 좀 하고. 잠잠해지면 소주 한잔 하자.” 건호씨는 청첩장을 받아 가는 후배들에게 일일이 ‘잠잠해지면 술 한잔’을 약속했다. 가족들끼리 조용히 치르려던 건호씨의 결혼식이 ‘요란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언론 보도 때문. 우연히 회사에서 마주친 어느 기자가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자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기자는 따져 묻기 시작했고 건호씨는 ‘보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고 몇 가지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한 시간여 만에 쌍따옴표가 쳐진 ‘멘트’가 되어 기사화됐다. “정말 무섭더군요.” 건호씨는 이 한마디로 언론에 대한 서운함을 대신했다.
‘덕분’에 21일 제주도 가족 여행에서 노무현 당선자 가족 네 명은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했다. 결혼식 진행을 두고 나온 의견들도 분분했다. ‘결혼을 연기하자’ ‘연기한다고 했다가 기습적으로 하자’ ‘아예 하객 제한을 두지 말고 파티식으로 하자’ 등등.
결국 청첩장을 ‘초청장’으로 간주해 인원 제한을 철저히 하자는 아버지 뜻에 가족들이 의견 일치를 봤다. 청첩장은 신랑측 5백 장, 신부측 1천 장을 찍기로 했다. 신부측 청첩장은 이미 상당수 발송을 마친 상태여서 오히려 신랑측 청첩장 수가 더 적게 됐다.
뷔페식 식사도 딱 5백인분만 준비했다. 신랑 가족 몫 5백 장 중에서 건호씨가 돌릴 청첩장은 50장. “아버지 몫은 50장도 안될 걸요. 어머니가 50여 장 정도 쓰실 거고… 대부분은 친척 분들께 돌릴 겁니다.” 사실 건호씨 결혼에 있어 가장 힘든 사람은 예비신부 배정민씨(27)일 듯싶다.
언젠가 한 스포츠신문에 ‘A대통령 후보, 탤런트 S양 며느리 낙점’이라는 식의 기사가 났을 때다. 기자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정민씨는 건호씨에게 “그거 혹시 당신 아냐”하며 눈을 흘기기도 했다. 하지만 표정에는 애정과 신뢰가 담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건호씨는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는 정민씨에게 생일선물로 ‘다리미’를 줄 만큼 자상한 성격. 반면 정민씨는 쾌활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에 가깝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술잔을 받으면 단숨에 받아 마신 뒤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펴고 앉는다.
▲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 ||
술자리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는 그녀지만 대통령가의 며느리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깨고 싶은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 준비 하면서 (그 친구) 많이 울었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도저도 다 안된다고 했으니까요. 정말 미안하죠….”
만나서 얘기한 지 처음으로 건호씨 얼굴빛이 흐려졌다. “아마 직장은 못얻을 거예요. 우리 가족이야 아버지 정치 시작할 때부터 주위 시선에 단련이 돼왔지만 그 친구는 이런 현실이 많이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21일 가족회의에서도 그런 정민씨에 대한 얘기를 포함한 많은 얘기들이 논의됐다.
한마디로 ‘앞으로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것이 회의의 화두였다는 것. 친인척 관리문제도 얘기가 나왔다.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서 부담이 적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버지께서 공약하신 사항대로 가자는 것이었죠. 불편한 일이 생기면 외가쪽은 어머니가, 친가쪽은 아버지가 나서서 집안 어른들끼리 해결하자고 얘기를 모았습니다.”
‘집안’ 문제뿐 아니라 ‘집’ 얘기도 나왔다. 건호씨 부부가 새로 구한 신혼집에서 사는 기간은 내년 2월까지. 노 당선자가 청와대로 들어간 뒤에는 다시 명륜동 집에서 살 계획이다. 궁리 끝에 나온 얘기 중 하나가 명륜동 집을 팔자는 것. 수리할 곳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내던 터니 아예 이 기회에 장남 내외가 살 보금자리를 새로 꾸미자는 것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어요 다만 명륜동 집 수리비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죠. 이런 얘기하면 집 값 떨어지는데….” 건호씨는 신혼집에 대해 ‘내가 받은 융자에 부모님 도움을 약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건호씨는 불만 비슷한 얘기를 덧붙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통령 가족을 영국의 왕실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정치인으로서 펼치고 싶은 꿈이 있으신 거고 저는 다르거든요. 연관을 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설혹 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어도 ‘아버지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니가 뭔데’라는 말이 사람들로부터 나와야 맞는 거죠.” 공교롭게도 이날 노 당선자 가족이 제주도에서 묵은 민박집 이름은 ‘숲속의 궁전’이었다.
청첩장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건호씨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봤다. ‘대통령 당선자 아들’로서 느끼는 부담에 대한 것이었다. 건호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얘기를 꺼냈다. 1988년. 노무현 변호사는 그 해 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여름에 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 무렵 건호씨가 학교 수업을 받다가 깜빡 졸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께서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요. 네 아버지는 이러저러하게 훌륭하신 분인데 너는 이게 뭐냐. 그 말이 지금까지 저를 따라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정치인 아들로서 ‘도덕적인 우월’을 요구받을 때가 가장 힘들다는 것. “타인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시선이 가장 힘들어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남들 하는 것처럼 살고 싶거든요. 무슨무슨 술집 이름 적힌 라이터 하나만 갖고 있어도 이런 질문을 받아요. ‘너 이런 데도 가본 적 있냐.’ 이거 그냥 길에서 나눠주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정치인 아버지를 둬서 혜택을 받아본 기억도 별로 없다. “공항 VIP룸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가족끼리 여행을 가도 저와 여동생은 꼭 일반 수속을 받도록 했지요. 그건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둘 때를 대비해 가족들에게도 준비를 시키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90년 3당 합당 이후 아버지는 정치를 그만 두실 생각이셨으니까요.”
애초에 특혜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을 빼앗겼을 때의 상대적인 박탈감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건호씨는 ‘준비된 대통령 아들’이었다. 외부의 ‘특별한’ 시선을 견딜 수 있는 ‘평범함’을 훈련 받아온 셈이다.
여기에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까지 덧붙였다. “제가 보는 아버지의 가장 큰 장점은 이슈를 선점하는 능력이에요. 어떤 이슈가 있을 때 ‘마케팅 포인트’를 찾아내고 늘 그 중심에 서지요. 또 이슈가 없을 때는 그걸 만들어 냅니다. 거기에다 지난 10년 동안 자신만의 자산을 꾸준히 축적해왔어요.
‘노무현’하면 국민통합, 지역감정 타파라는 걸 떠올리도록 한 거지요. 바로 그게 오늘의 아버지를 있게 했습니다.” 이건 좀 뜻밖의 얘기였다. 마케팅 포인트, 이미지 메이킹… 아들로서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치고는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저를 평가해도 비슷할 겁니다.”
여기까지 얘기를 하다 잠깐 생각에 잠긴 건호씨는 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얘기를 정리했다. “평범한 개인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입니다. 정치인 노무현을 볼 때 아버지께서 대통령이 돼야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의 불편과 고통은 그래서 감수할 수가 있는 거지요.”
인터뷰 내내 느낀 것은 건호씨의 정치에 대한 ‘풍월’이 또래의 그것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8일 밤 ‘정몽준 대표의 쿠데타’에 대해 질문을 해봤다. “어머니는 걱정이 돼서 잠을 못주무셨지요. 그런데 아버지와 저는 낙관을 했어요.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잃는 표만큼은 얻겠더라구요. 그날 밤 아버지께서 집에 들어오시면서 던진 첫 마디가 ‘차라리 잘 됐지, 뭐’였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서야 잠을 주무셨지요.”
건호씨가 아버지와 이처럼 같은 견해를 가진 것은 표밭을 읽는 식견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건호씨는 그보다 ‘사고 방식이 같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 친구분들과 등산을 가는데 앞서가던 아버지께 친구분이 농담을 던지셨어요. 무슨 농담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럼, 맨발로 가지 뭐’하고 대답하셨어요. 그러자 친구분께서 다시 뒤에 가던 제게 똑같은 농담을 하셨는데 저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한 적이 있어요. 생각이 서로 놀랍도록 비슷한 점이 많아요”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게 한 번도 예외의 특혜를 줘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올해 초 대학원 진학을 두고 고민하는 아들에게는 “학비만 많이 드는 룸펜이 되기 십상”이라며 취직을 강권했다는 것. 건호씨가 올해 5월 LG전자에 1차 합격을 한 뒤 면접을 볼 때조차 회사측은 그가 ‘노무현 후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캠퍼스 리쿠르팅’을 통해 지원한 터라 학력을 제외한 다른 인적사항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사를 한 뒤에도 건호씨는 ‘에누리’없는 신입 사원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 전날인 24일까지 꼬박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혼 여행 휴가도 딱 일주일만 받았다. 휴가 중에 끼어있는 1월1일까지 휴가를 사용한 날로 계산해서 1월2일 시무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서운한 건 없어요. 조직에 있는 동안은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계속 이 직장에 다니고 싶고 아버지 임기가 끝나더라도 다른 외부적인 이유에 의해 그만두고 싶지는 않은데…. 글쎄, 5년 뒷일은 아무도 모르겠지요.”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2개의 휴대폰 중에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휴대폰 창을 유심히 바라보던 건호씨는 전화기를 소파 밑에 넣어버렸다. “부산 전화번호인데…, 이거 안쓴지 오래된 휴대폰이거든요. 이 전화는 안받는 게 좋겠네요.” 아버지가 경선에 나선 뒤로 엉뚱한 전화들이 심심찮게 걸려온다는 것이다.
안면도 없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누구를 잘 아는데 소개시켜 주겠다’는 용건을 꺼내는 것이 대부분. “아버지 임기 내에 사업은 절대 안할 겁니다. 다닐 수 있다면 회사에 계속 다니고 싶어요.” 곧이어 다른 전화기로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재깍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어, 그래. 응… 바퀴벌레? 그렇게 많아? 편의점에서 팔까? 알았어 사 갈게.” 집에 바퀴벌레가 많으니 살충제를 사오라는 정민씨 전화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 11시. ‘포장마차에서 딱 한잔 더’를 주장하는 기자의 꼬드김에 건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바퀴벌레로부터 여자친구를 구해야죠. 게다가 내일은 샐러리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월요일 아닙니까.” 누가 뭐라든 그는 직장인의 이름으로,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갈 평범한 30세의 남자였다.
돌아서는 건호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의 마음은 생각보다 가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 위에 얹힌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세상이 그에게 내려놓은 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