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가 계속될수록 그녀는 나락으로…
<오즈의 마법사>로 어린 나이에 스타덤에 오른 주디 갈런드. 40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쇼에 출연했지만 방송사로부터 혹사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0대 때 스타덤에 올랐던 주디 갈런드가 전성기를 맞이해야 할 20~30대 시절을 힘들게 보낸 근본적 원인은 약물이었다. 아역 시절엔 통통한 얼굴이 매력일지 모르겠지만,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었던 주디 갈런드는 성인 연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이어트 약을 복용해야 했고, 곧 중독 상태에 빠졌으며, 그녀의 약에 대한 의존도는 날로 높아져 진통제와 수면제와 진정제 등으로 그 종류가 늘어갔다. 그녀의 정신 상태는 점점 불안정해졌고, 곧 ‘주디 갈런드’라는 이름은 업계에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촬영 현장에 늦기 일쑤였고 리허설 도중 감독과 종종 부딪혔다.
그녀 자신도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방법은 그다지 바람직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멘토가 될 수 있는 남자와 로맨스를 맺으려 했다. 첫 대상은 밴드 리더였던 아티 쇼였지만 당대의 글래머 배우 중 하나였던 라나 터너에게 빼앗기고 만다. 미남 스타 타이론 파워에게도 연정을 품었지만 역시 라나 터너가 가로챘다. 한 여자에게 두 번이나 남자를 빼앗긴 경험 이후 할리우드라는 동네는 그녀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좋지 않은 상황은 이어졌다. 작곡가인 데이비드 로즈와 사랑에 빠져 첫 결혼을 했지만, 그녀가 임신을 하자 당시 계약되어 있던 MGM 스튜디오가 압력을 넣었고, 결국 낙태 수술을 한 후 이혼했다. 당시 명감독이나 제작자인 조셉 맨키비츠와의 관계도 허무하게 끝났다.
두 번째 결혼 상대는 뮤지컬의 거장인 19세 연상의 빈센트 미넬리 감독. 딸 리자 미넬리를 낳으며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사랑은 6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다. 여전히 약물에 의존한 ‘불안한 여배우’였던 그녀는 스튜디오로부터 해고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이에 미넬리 감독은 그녀를 떠나 버렸던 것이다. 세 번째 남편은 프로듀서였던 시드니 러프트. 다행히 그는 갈런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멘토로서 그녀의 재기를 도왔다. <스타 탄생>(1954)으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고, 1959년 전설적인 카네기 홀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는 갈런드에게 CBS에선 <주디 갈런드 쇼>를 제안했다. 회당 2만 5000달러를 받았고, 부가 판권마저 그녀의 소유로 인정해주었던 이 쇼를 위해 CBS는 다년간 독점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CBS의 편성 책임 간부 허벨 로빈슨이 갑자기 밀려나면서, 업계에서 ‘웃는 표정의 코브라’(smiling cobra)라는 섬뜩한 닉네임으로 불리던 짐 오브리가 갈런드의 협상 파트너가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오브리는 갈런드는 매우 싫어했다. 그는 저렴한 출연료의 젊은 남자 코미디언들이 돈이 된다고 생각했고, 갈런드 같은 중년 여성의 쇼를 지지할 생각은 없었다.
오브리는 무리한 요구를 시작했다. 그는 쇼에 저급한 유머를 접목시키려 했고, 갈런드의 가족이 LA로 이사를 와야 한다고 강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재기를 위해 오브리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브리의 요구는 점점 더 커졌다. 오브리는 화려한 쇼를 위해 움직이는 무대를 기획했는데, 사운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이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건 갈런드에게 매우 힘든 도전이었다. 변변한 대기실도 제공되지 않았고, 갈런드 특유의 격정적인 몸짓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방송 시간대는 일요일 오후 9시. 당시 최고 인기를 끌던 경쟁사 NBC의 <보난자>가 방영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갈런드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1963년 9월 첫 방송 때 <보난자>의 시청률을 10퍼센트 이상 앞지르며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문제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였다. 매니저인 데이비드 비겔먼은 갈런드를 유혹해 연인이 되었고, 그녀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대부분은 유용했다. 러프트와 이혼 수속에 들어간 갈런드는 양육권을 놓고 힘겨운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녀는 알코올에 빠졌고, 쇼의 스태프들에게 새벽마다 전화를 걸어 술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할 지경에 이르렀다. 방송사의 요구도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고, 이런 상황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방송사 앞에선 주디 갈런드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라는 팬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결국 쇼는 1년 만에 끝났고, 만신창이에 빈털터리가 된 갈런드는 이후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친 후 1969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