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자동 한음식점에서 열린 방미.방일 수행 경제계 인사초청 오찬에 참석한 손길승 전경련 회장(왼쪽)이건희 삼성회장(가운데). 오른쪽은 구본무 LG 회장. | ||
긴장된 표정으로 만난 이들 3대 그룹 관계자들이 이날 회동에서 논의한 것은 대선자금 지원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책회의라기보다는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정도였다.
이날 회동에서 고위 관계자들이 나눈 대화의 골자는 “당신네 기업에서는 누가 책임지기로 했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 맞서 자사를 대표해 스스로 “내가 죄인”이라며 총대를 멜 사람이 누구냐는 것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나는 못간다'
최근 재계에 벌어지고 있는 소동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압축할 수 있다. 검찰이 “대선자금 제공 내역에 대해 (해당 기업이) 이실직고할 경우 불구속 수사를 하겠다”고 천명한 뒤 기업별로 ‘우리 회사에서는 누가 이 문제를 책임질 것인가’하는 문제로 심각한 내부 진통을 겪고 있는 것.
이와 관련해 재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현재 일부 재벌기업에서는 희생양이 되겠다고 스스로 나선 인사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재벌에서는 총대를 메겠다고 선뜻 나서는 인사가 없어 고민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또다른 재계 관계자는 “누가 총대를 메든 검찰청에 다녀오면 직장생활은 더 하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책임을 지는 인사에 대해서는 특별 ‘보상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선자금 또는 정치자금 사건의 경우 여느 기업비리 사건과 달리 오너에 버금갈 만큼의 비중있는 인사가 연관되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대선자금의 경우 정상적인 회계처리가 되지 않은 비자금이라면, 비자금을 관리하거나 기업의 내밀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는 인사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기업으로선 핵심 인사가 수사를 받게 되면 기업의 또다른 기밀사항까지 드러나 엉뚱한 문제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적정 인사’ 선정을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검찰도 “이실직고하면 처벌 감면”이라는 수사원칙을 내놓긴 했으나 수사의 범위 및 수준에 대해 “수사는 확실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치고 있어 구렁이 담넘어가기식의 어물쩍 수사에 그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곤혹스러운 것은 검찰의 이같은 방침 때문이다.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밀한 기업비밀을 알고 있는 핵심 경영인을 보낼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기업에서는 총수가 평소 자신의 핵심 측근이라고 생각해온 특정인에게 총대를 메달라고 요청했다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떠넘기느냐”고 반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10대 재벌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진 이 기업의 경우 대부분의 사안을 총수가 직접 챙기는 바람에 핵심 경영인조차 기업 내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또다른 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기업의 경우 일부 경영인들이 출장을 핑계로 장기간 해외에 나가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주요 재벌들은 검찰 수사에 대비해 나름대로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선자금 제공 사실이 밝혀진 삼성그룹은 검찰이 선 실무진 조사, 후 고위층 조사로 방침을 정함에 따라 나름대로 이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언론에서 검찰이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을 소환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검찰은 일단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김인주 삼성구조본 재무담당 부사장 등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를 직접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오가고 있다.
LG그룹의 경우에도 일단 대선자금 지원내역이 일부 드러난 상황이어서 검찰 수사를 피하기는 어렵다는 게 검찰과 재계 안팎의 분석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강유식 구조본부장과 조석제 재무담당 부사장이 검찰 수사에 나설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LG그룹의 경우 구조본의 역할이 삼성그룹과 질적, 양적인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이 직접 나설지는 미지수라는 견해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아직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현대차의 경우 삼성, LG처럼 그룹의 경영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본이라는 조직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 이 때문에 정순원 기업총괄본부장의 이름이 오가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가닥을 잡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선자금 제공 기업의 명단에 오른 롯데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 롯데그룹은 국내 4대 재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번 수사대상 리스트에 올라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롯데는 롯데백화점과 롯데제과가 주축이 돼 이번 소환에 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재계 인사들의 줄소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재계 일각에서는 검찰의 이번 대선자금 수사 여파가 재계의 ‘세대교체’를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색다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창업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간 재벌그룹의 경우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그동안 경영을 주도해온 원로급 경영인들을 대거 퇴진시킬 것이라는 세칭 ‘살생부’가 나돌고 있는 것.
특히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올 연말까지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수사 결과에 대해 원로급 경영인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선에서 기업의 책임을 털어내고 내년 인사에서는 신진 경영인으로 물갈이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현재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재벌들의 경우 ‘경영권 이동’ 시점과 맞물려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상무가 지난해부터 본격 경영수업에 들어가 있고, 현대차 그룹 정몽구 회장의 장남 정의선 부사장도 현재 경영 전면에 나서 있는 상황이다.
LG그룹도 후계구도 정립과는 관련이 없지만 구-허씨가 갈라서면서 새로운 지주회사가 출범하는 등 그룹 안팎의 경영 변화가 많은 상황이고, 롯데그룹의 경우 신격호 회장의 차남 신동빈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있다.
때문에 재계에서는 검찰의 이번 대선자금 수사가 가져올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계의 판도에도 변화를 몰고올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