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톤 트럭분 미술사료 거액 마다하고 ‘기증’
부산 1세대 판화가로 평생 지역 미술사 연구와 우리말 사랑에 앞장선 이용길 화백이 지난 6일 지병으로 부산대병원에서 별세했다. 사진제공=국제신문
교사직을 하면서도 이 화백은 화가로서 판화 작업을 이어나갔다. 부산 1세대 판화가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는 부산 하야리아 미군 부대의 요청으로 이례적으로 부대 내에 작업실까지 제공받아 작품 활동을 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화백은 1990년대 초 작품 활동의 중반기라고 부를 수 있는 50대 후반부터 작품 수를 많이 줄였다. 대신 미술 서적과 도록, 팸플릿, 포스터, 평론, 기사 등 부산 미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료를 모으고 정리·연구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자료 모으기 활동을 더욱 본격적으로 해나간 것이다. 부산시나 시립미술관 등 공공기관은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한 작업을 이 화백 혼자서 끈질긴 집념만으로 해나갔다. 그 결과 그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의 부산 미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화백이 살고 있던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에 위치한 2층 주택은 미술 관련 자료로 발 디딜 곳이 없다. 그의 2층 화실은 물론 거실, 복도, 계단 등 집 곳곳에 자료가 박스째로 쌓여있다. 이 화백과 친분이 있던 미술평론가 옥영식 씨는 “당시에는 부산 미술과 관련된 자료를 보려면 이 화백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책을 저술했다. 1928년부터 1979년까지의 자료를 정리해 1995년 출간한 <부산미술 일지>와 그 이후의 사료를 정리한 <부산미술사료>, 각종 부산 미술 관련 기사, 평론 등을 스크랩한 <가마골 꼴아솜 누리> 등이 그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부산 하야리아 부대 내 작업실에서 미군과 군인 가족이 실크스크린 판화 작업을 하는 이용길 화백을 지켜보고 있다.
이 화백을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앞서의 미술평론가 옥영식 씨는 “이 화백은 빙 둘러서 말할 줄을 몰랐다. 늘 직접적으로 바른 소리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그의 성격이 작품에도 반영된 것인지, 그의 작품들은 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 화백은 사회 현안에도 자주 앞에 나서며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인 것이 낙동강보존회 활동. 그는 1978년 만들어진 낙동강보존회 창단 멤버로 합류해 나중에는 부회장까지 맡았다. 그는 사회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낙동강보존회 회원의 이름으로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쳐댔다. 그러니 공안정국에서 경찰들이 보기에 이 화백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군사 정권 시기에는 그의 집 앞에 형사들이 자주 찾아와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그는 낙동강 보호와 관련된 그림대회나 걷기행사 등 각종 문화 행사를 추진했다.
또한 이 화백은 순우리말 쓰기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서클’이라는 말 대신 지금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동아리’라는 순우리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 이도 이 화백이었다. 앞서 소개한 그의 저서 <가마골 꼴아솜 누리>라는 제목도 ‘부산 미술계 반세기’라는 말을 그가 순우리말로 바꾼 표현이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의 ‘미적기술’을 줄여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술’이라는 단어도 ‘아름다운 솜씨’를 줄인 ‘아솜’, 회화를 ‘실그림’, 조각을 ‘깎새’, 판화를 ‘찍그림’이라 부르는 등 2만 개가 넘는 순우리말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예술계 일각에서는 이 화백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무대에 대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부산 미술을 강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옥 씨는 이 화백을 떠올리며 그는 일꾼이었다고 회고했다. 옥 씨는 “그는 1970~1980년대 열악했던 부산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앞장섰다. 후배들을 돕기 위해 부산판화미술협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1975년부터 1993년까지 부산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며 “부산 미술의 자존심”이라고 강조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