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현정씨의 지난 99년 모습. | ||
고씨는 이날 새벽 4시30분께 자신의 BMW X5를 타고 한남동 자택에서 나와 모처로 이동중 앞에 가던 택시를 들이받았다. 이 충격으로 택시는 15∼20m 정도 밀려가 앞에 서 있던 권아무개씨(29•여)의 SM520 승용차를 연쇄적으로 들이받았다. 이 사고는 발생 20일 후인 지난 15일,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권씨가 경찰의 사고 처리에 대한 의혹과 고씨의 태도를 문제삼아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에 이와 관련된 글을 올려 세상에 알려졌다.
뒤늦게 이 사고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고씨는 “피해자측에 사과한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고씨와 피해자측의 갈등은 쉽게 진정되지 않고 있다. 특히 고씨의 해명과 사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유명인이 관련돼 있다는 점 때문인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날은 2002년 12월25일 새벽이었지만, 사고가 정식으로 접수된 날짜는 2003년 1월3일이었다. 사고 발생 9일 동안 공중에 붕 떠 있었던 셈이다.
이 사고 처리는 용산경찰서 교통과였다. 담당자는 사고조사반 허아무개 경사였다.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허 경사는 사고 직후 가해자 고씨와 피해자들을 상대로 간단한 조사를 벌인 뒤 사고를 접수를 하지 않고 양측 모두 귀가시켰다.
사고가 정식으로 접수된 것은 그로부터 9일이 지난 뒤. 피해자 권씨는 “경찰이 사고 처리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자 편을 들었다”며 “경찰은 신세계와 무슨 관계이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봐주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허 경사는 지난 18일 “신세계나 삼성으로부터 어떠한 압력을 받은 사실이 없다”며 “가해자가 고현정씨이기 때문에 사고를 특별히 처리한 것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통상적인 교통사고 처리 절차에 따라 했을 뿐이라는 것. 하지만 허 경사는 지난 16일 용산경찰서의 한 파출소로 전보 조치되고 말았다. 사고 지점은 고씨의 집 근처인 한남2동사무소 샛길에서 나와 북한남 3거리 방향으로 1백m쯤 진행한 곳이었다.
▲ 본지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피해자 권아무개씨(오른쪽). 이종현 기자 | ||
쟁점은 사고 당시 고씨의 차량 속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찰과 피해자측의 주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권씨는 “내 차가 시속 30km 정도였는데 시속 40∼5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던 차량이 받은 승용차에 다시 받혀 그렇게 부서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나씨 역시 “고씨 차에 받힌 직후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15∼20m 정도 밀려 권씨의 승용차를 받았다. 내 택시가 파손된 것이나 천둥치는 듯한 충돌음만 봐도 고씨의 차는 최소한 80∼90km는 됐을 것”이라며 고씨의 과속을 지적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고씨가 사고를 일으킨 시각은 12월25일 새벽 4시쯤으로 나와 있다. 고씨측은 이에 대해 지난 1월16일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때도 아니고 성탄절 새벽에 급히 차를 몰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간 부분은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는 지적이 많다.
사고 직후 고씨의 차에 받힌 택시 운전자 나씨는 2∼3분간 의식을 잃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나씨는 택시 밖으로 나와 “무슨 운전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라고 고씨에게 거세게 항의했다는 것. 그동안 사고 현장 근처의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했고, 나씨는 고씨를 가리키며 경찰에게 “이 사람 술먹은 것 같은데 빨리 음주 측정해보라”고 재촉했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나씨에 따르면 이 시각은 사고가 발생한 후 길어봐야 3∼4분이 경과된 이후였다고 한다. 남자는 “내가 이 사람(고현정씨) 대리인이니 나에게 이야기 하라”며 대리인임을 자처했다는 것. 고씨와 나씨가 경찰서로 간 뒤 이번에는 또 다른 30대 남자가 대리인이라며 나타났다.
언론에 고씨의 경호원 겸 운전기사로 알려진 정아무개씨였다. 나씨는 경찰 조사를 마친 뒤 이 두 사람과 함께 정씨의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에 대리인을 자처했던 남자는 중간에 내렸다.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올 수 있는 대리인 두 명이나 두고 있는 국내 최대 재벌 삼성가의 며느리 고씨가 밤늦은 시각 혼자 차를 몰고 나온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찰서로 향하는 경찰차 안에서도 나씨는 함께 탄 고씨에게 “도대체 무슨 운전을 그렇게 험하게 하느냐. 전방 주시를 하지 않았느냐”며 고씨를 나무랐다. 이에 대해 고씨는 “미안하게 됐습니다”라며 짤막하게 답변하곤 이내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경찰서 안으로 걸어들어갈 때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도 고씨는 사고 경위와 처리에 대해서만 간략히 답변하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권씨는 “고씨가 피해자들에 앞서 먼저 경찰서를 떠날 때 양쪽에 있던 나씨와 내게 형식적으로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고 말했다.
또 고씨는 사고가 언론에 알려진 이후에도 “무엇보다 고씨로부터 직접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고 싶다”는 권씨의 요구에 대해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녀의 침묵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