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한 선배 만나 기 받을래요”
박명환은 “팀분위기가 기대 이상”이라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후배들이 많아서 그 친구들을 통해 나를 다잡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달 30일, 마산야구장에서 만난 박명환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한껏 기대감을 부풀리면서 말만 앞서는 선수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LG에서 코치직 제의를 했지만, 거절하고 팀을 나왔다. 나오면서 재기를 천명했고, 다시 시작한다면 LG로 돌아오고 싶다는 얘기도 했었다.
“LG에 진 빚이 많다. 그래서 선수생활하며 그 빚을 갚고자 LG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절대적이다. 사장님, 단장님, 그리고 코칭스태프 모두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셨다. 거기서 제대로 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결국엔 피지도 못하고 재활에만 매달리다 팀을 나오게 됐다. 공개테스트에서 NC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를 필요로 했다. 날 원하는 팀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LG에 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2006년 FA가 된 후 LG와 투수 FA 최고액인 4년 40억 원의 대형계약을 맺었다. 2007년 10승6패 평균자책점 3.19를 기록한 뒤, 이후엔 수술과 재활로 야구장 밖에서 보낸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그로 인해 ‘먹튀’란 오명도 뒤집어썼다.
“돈을 많이 받은 만큼 그 이상의 고통을 느낀 시간들이었다. 2008년 시즌 마치고 수술을 받기까지 그 몸값을 하려고 팔이 끊어지는 고통을 참고 또 참으며 버텼다. 그래도 던지려고 했다. 왜? 난 40억짜리 몸값이니까. 8년 동안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등판했다. 1999년 시범경기에서 어깨를 다친 뒤로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던 셈이다. 마침내 그 한계치에 이르러 수술 직전까지 갔을 때 의사는 (수술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했지만, 난 무조건 어깨를 열어 달라고 부탁드렸다.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수술을 하게 됐는데, 그 후엔 허벅지가, 그리고 허리가 고장나면서 다시 재활을 반복해야 했다.”
―2010년 말 다시 FA 자격을 안았지만, 연봉이 5억 원에서 무려 90%나 삭감된 5000만 원에 LG와 계약했다. 역대 최고 삭감률에, 최고 삭감액이었다.
“아마 당분간 그 기록은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웃음). 하지만 나로선 아주 홀가분한 숫자였다. 더 이상 ‘먹튀’ 소리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5000만 원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에 가족들이 느끼는 상실감이 컸다. 그래서 ‘앞으로 벌면 되지’하며 아내를 위로했는데 벌기는커녕 ‘백수’를 자청하는 바람에 아내가 한동안 힘든 시간이 됐을 것이다. 그래도 야구를 포기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힘과 용기를 줬다. 리더십 관련 책을 사다주면서 야구 외적인 부분에 관심을 두게 해줬다. 참으로 고마운 ‘내 편’이었다.”
‘후회 없이’라는 다짐을 적은 박명환의 야구 모자.
“딸만 둘인데, 큰 애는 아빠가 야구선수인 줄을 알지만, 네 살이 된 둘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TV에서 공 던지는 아빠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 줄 모른다. 아이들은 처음에 아빠가 집에 있다고 엄청 좋아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길어지니까 큰 애가 ‘아빠, 돈은 언제 벌어?’하고 물어보더라. 아이들한테 아빠가 ‘야구선수 박명환’이란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재활만 하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왕년의’ 야구선수가 아닌, NC 다이노스 박명환으로 인식시켜주는 게 하나의 작은 목표이다.”
―결국 절치부심 끝에 지난 9월 30일 8개 구단 스카우트가 보는 자리에서 공개테스트를 가졌다. 그 결과 NC유니폼을 입게 됐는데, 당시 테스트를 치르는 심경이 어떠했나.
“와, 정말 떨렸다. 테스트 앞두고 공을 던지는데 생각 외로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포기할까? 하는 마음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용기를 내 공개테스트 자리에 나갔다. 여기서 못하면 깨끗이 은퇴할 생각으로. 그러다 NC 다이노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통산 102승을 거둔 베테랑 투수가 공개테스트 자리에서 긴장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마 그 테스트 자리에 모인 8개 구단 스카우트들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마운드에 서 있는 나도, 그런 나를 지켜보는 분들도 모두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난 절박했고, 어떻게 해서든 다시 기회를 잡아야 했다. 최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최선의 피칭을 선보였다. 아마 가능성을 보고 NC에서 기회를 주신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김경문 감독님 밑에서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동이다. 더욱이 NC에는 내가 평소 좋아했던 손민한 선배가 재기를 통해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셨다. 좋은 인연들을 마산에서 이어가면서 새로운 부활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1996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박명환은 당시 FA가 꿈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살았던 삶을 FA 대박 계약을 통해 벗어나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지금 박명환의 꿈은 ‘야구’이다. 마지막 기회이고, 마지막 도전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이 제일 힘든 시간인 것 같다고 말한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야구선수의 삶…. 다시 그 위로 올라설 수 있을까? 박명환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산=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