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달인… 혹시 가공의 인물?
‘얼굴 없는 화가’ 혹은 ‘게릴라 예술가’로 불리는 영국의 ‘뱅크시(Banksy)’가 지난 10월 한 달간 뉴욕에서 게릴라 전시를 열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인적이 드문 뒷골목 혹은 버려진 건물의 담벼락에 몰래 그림을 그리고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주로 사회 풍자, 고발, 혹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그리고 있으며, 때문에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낙서꾼이 아닌 의식 있는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서 지난 2010년 <타임>은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비단 그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다.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는 ‘익명성’ 역시 그를 유명인으로 만든 중요한 요소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찰 단속에 걸린 적이 없었던 그는 주로 심야를 틈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 후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아직까지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천재,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범죄자로 여겨지는 ‘뱅크시’, 그는 과연 누구일까. ‘뱅크시’의 은밀한 작품 활동은 오늘도 어느 뒷골목에선가 계속되고 있다.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가 버려진 건물 담벼락 등에 그린 작품들. 주로 사회 풍자나 고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뱅크시가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동물은 다름 아닌 쥐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떠올렸던 것과 달리 뱅크시가 의미하는 쥐는 권력층에 쫓기고 학대당하는 일반인들이다.
뱅크시가 다루는 작품 속 주제는 반전, 반자본주의, 반세계화, 무정부주의, 반제국주의 등 자유와 반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결코 심각하진 않다. 전쟁, 학살, 폭력 등과 같은 심각한 주제를 익살과 풍자, 그리고 해학으로 풀어내는 것이 그의 주된 특기다. 그의 작품을 보고 미소를 짓게 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다.
1990년대부터 런던, 브리스톨, 비엔나, 샌프란시스코, 바르셀로나, 파리 등 주로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나 폐허가 된 건물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려왔던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소수만 누리는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는 뜻을 비친 바 있다. 닫힌 공간인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기보다는 열린 공간인 뒷골목을 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열린 장소에 있다 보니 작품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는 일도 잦다. 건물주들의 항의로 그림이 지워지거나 경찰과 관료들이 ‘반달리즘(공공 기물 파손 행위)’으로 규정하고 삭제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도심 속을 누비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뱅크시는 주로 ‘스텐실 기법’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 스텐실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신속성’ 외에도 “처음 스텐실 작업을 했을 때부터 나는 스텐실의 힘을 느꼈다. 스텐실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피티가 하층민의 반항을 나타낸다면 스텐실에는 거기에 더해 어떤 역사가 있다. 과거 혁명을 일으키거나 반전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주로 스텐실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이 유명해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의도와 달리 작품 가격은 미술 시장에서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가령 해외 어린이 노동 제품을 구입하는 영국 기업의 실태를 꼬집은 <뱅크시-노예노동(깃발을 만드는 소년)>은 경매에서 최고 88만 유로(약 12억 원)에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가장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친한 친구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신원이 공개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알려진 것이라곤 영국 브리스톨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1973~1974년생이라는 것, 그리고 백인 남자라는 것 정도가 전부다. 지난 10월 뉴욕에서 한 달 동안 매일 작품을 그렸는데도 단 한 번도 경찰에 체포된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신분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달인인 셈이다.
언론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지난 2011년 다큐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을 때에도 “복면을 쓰고 시상식에 참가할 수 없다”는 시상식 측의 말을 듣고 참석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숨어서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체포될 경우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거리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만일 발각될 경우 사유지 훼손 내지는 소유권 침해로 기소당할 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팬들 역시 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길 내심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팬들은 오히려 그의 정체를 공개하려는 사람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한다. 일례로 한 아티스트가 사진 공유 사이트인 ‘인스타그램’에 ‘나와 내 아들, 뱅크시’라는 제목의 사진을 올리자 곧바로 그래피티 예술가들 사이에서 항의성 댓글이 빗발쳤고, 결국 게시자는 사진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뱅크시가 지금까지 완벽하게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것은 지지자들의 이런 보호(?)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 ‘브루클린스트리트아트’ 블로그 운영자인 스티븐 해링턴은 “사실 많은 거리 예술가들은 뱅크시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뱅크시의 정체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 상태”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바로 이 점이 거리 예술가들 사이에서 뱅크시가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뱅크시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사진.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뱅크시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뉴욕의 그래피티 예술가 1세대 가운데 한 명인 제임스 톱은 “뱅크시는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권력 있고 돈 많은’ 예술가 집단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신비로운 인물’의 작품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개인이 아닌 예술가 집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지금까지 뱅크시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 몇 차례 뱅크시로 추정되는 인물이 찍힌 사진이 여러 장 거론됐는가 하면, 직접 뱅크시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따금 등장했다. 가령 2007년 동부 런던에서는 담벼락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30대 중반의 갈색 머리 남성의 사진이 찍혔는가 하면, 2011년 산타모니카에서도 뱅크시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이 인터넷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지난 2008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이 공개한 사진 속 남성이다. 뱅크시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푸른색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으며, 작업 중인 듯 발아래에는 스프레이 캔이 놓여 있었다. 이 사진은 자메이카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사진 출처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이 사진 속 인물을 찾기 위해서 <데일리메일>은 뱅크시의 고향인 브리스톨을 찾아가 수소문을 했고, 그 결과 로빈 거닝햄이라는 이름의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거닝햄과 학교 동창이었다고 주장하는 한 남성은 “거닝햄은 우리 반에서 가장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가 뱅크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확신했다.
또한 LA의 한 창고 주인인 조엘 어넹스트 역시 사진 속 인물이 뱅크시가 맞다고 증언했다. 2006년 뱅크시가 미국에서의 첫 아트쇼인 ‘베얼리 리걸’을 열기 위해서 자신의 창고를 임대했다고 주장하는 어넹스트는 “당시만 해도 그가 뱅크시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사진 속의 남성이 바로 창고를 빌렸던 그 남자가 맞다”고 확언했다.
지난 10월 한 달간 뉴욕에서도 ‘뱅크시 목격담’은 적잖은 화젯거리였다. 한 남성이 트위터에 “뱅크시를 찾았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네 장의 사진을 첨부하자 온라인에서는 갑론을박이 한창 벌어졌다. 뱅크시의 이동 미술 작품인 ‘양들의 사이렌’ 트럭을 촬영한 사진 속의 인물들 가운데 트럭 위의 남성이 뱅크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트럭 왼편에 서있는 남성이 자메이카에서 촬영된 사진 속 인물과 흡사하다면서 그가 바로 뱅크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뱅크시 측은 현재까지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편 그의 작품에 대한 찬반 논란 역시 높아가는 유명세와 함께 더욱 더 뜨거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엄연한 사유지 침해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건물주들과 경찰, 관료들은 뱅크시의 작품 활동을 불법적 행위 및 범죄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그래피티는 예술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그래피티는 퇴폐의 상징”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 그의 작품을 가치 있는 예술이라고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의 활동을 저지하는 것은 “엄연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며 항의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