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못 이룬 꿈 “보고싶다,우리 가족”
미국에 있는 유가족들은 항공비를 못구해 이 씨의 장례식마저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출처=YTN 캡처
이 씨의 빌라에 도착한 친구 김 씨는 작은 방이 불이 켜진 채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 씨는 방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인천 계양경찰서 형사팀 관계자는 “문이 잘 열리지 않아 발로 밀고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문에 테이프가 발라져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 씨의 사인은 가스중독이었다. 이 씨는 작은방의 창과 문틈을 테이프로 막고 번개탄을 피웠다. 당시 이 씨는 연소하다 만 번개탄 옆에 앉아서 숙인 자세로 발견됐다. 무엇이 이 씨로 하여금 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을까.
숨진 이 씨의 부인과 아들들은 2009년 유학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부인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 2명과 함께 자신의 이모가 거주하는 미국 유타주로 떠날 계획을 준비했다. 당초 이 씨의 부인은 이 씨도 함께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씨는 자신은 한국에 남겠다며 부인과 아들만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이후 홀로 남은 이 씨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며 미국으로 생활비를 송금했다. 이 씨는 최근 1년간은 전기기사를 하며 지속적으로 미국에 있는 가족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일감이 많지 않아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고 아들의 용돈 정도만 근근이 송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아들들의 유학비용과 미국 생활비 대부분은 이 씨의 부인이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4년 동안 부인과 아들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에 10남매인 이 씨의 형제들은 지난 8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이 씨의 미국 항공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4년 만에 드디어 이 씨가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씨는 이마저도 직장문제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 씨의 유서는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집안 내 탁자 위에서 발견됐다.
“가족들 OO, △△,(아들 이름) OO엄마 그리고 형제분들한테 죄송합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OO, △△ 끝까지 책임 못 지어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들께 죄송합니다.”
이 씨는 평소에 가족이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서에 오롯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씨는 생을 마감하고서도 그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하지 못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이 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계양서 형사팀 관계자는 “유족이 미국에 있는 부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가 겹쳐 이 씨의 부인과 아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상황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씨의 발인은 인천의 한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지인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지만 가정 불화 같은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러기 아빠들은 가족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기러기 아빠 희망을 향해 날다’란 주제의 간담회에 참가했던 채정호 가톨릭대 의과대학 교수는 “기러기아빠들이 각종 문제점 중 정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한다. 남성은 강력한 스트레스에 비해 반복적으로 미약하게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정서적 표현보다 충동적 행동표현이 많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네트워크 중심의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 박경은 사업기획팀 팀장은 “현재 기러기 가족과 관련된 건강가정지원센터의 프로그램은 매우 소수이며 2011년도에 준비한 프로그램도 원래 취지로 운영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하며 “기러기아빠가 건강가정지원센터와 같은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전예방적인 관점에서 기러기가족에 미리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경찰은 “이 씨에게서 우울증 전력이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씨가 신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 중이다”라고 말했다.
해마다 2만 2000가구의 기러기 가족이 생겨나고 있다. 이 씨의 허망한 죽음으로 기러기 아빠의 어두운 단면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