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다운 빼앗고도 아쉬운 판정패…한국도 일본도 ‘갸우뚱’
지난 11월 19일, 제주 그랜드호텔 특설링에서 열렸던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 8차방어전에서 도전자 손정오가 챔피언 가메다 고키와의 12라운드 경기 끝에 2-1 판정패를 당했다. 가메다 고키는 처음 치른 원정 방어전에서 손정오의 파상공세에 밀려 경기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다 한 차례 다운까지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판정승을 거뒀다. 한국은 물론 일본 언론들도 ‘가메다의 승리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챔피언의 승리에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손정오의 매니저인 김한상 한남체육관 관장도 “한국에서 열린 경기였지만 주최를 가메다 프로모션이 주관했고, 챔피언 어드밴티지가 있었다고 해도 이 결과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라며 재대결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다.
경기 후 여론은 들끓었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아쉽게 패한 손정오에 대한 응원이 더해지면서 ‘손정오’란 복서에 대해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경기가 끝났지만, 진한 여운을 안고 제주에 남아 가족들과 함께 심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15년 만의 세계타이틀매치 도전에 나섰다가 아쉽게 판정패당한 손정오. 서른둘, 복서의 꿈을 놓지 않기 위해 다사다난한 인생을 경험했다.
▲아쉽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세계타이틀매치였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하다. 경기 후 언론에서는 (김한상)관장님의 말을 빌려 제소 운운했는데, 관장님은 제소가 아닌 재대결을 추진해보겠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안다. 경기 결과가 다 나온 마당에 제소하는 건 스포츠맨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쪽에서 재대결을 원한다면 몰라도. 챔피언이 원해야 재대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로선 가메다가 재대결을 하자고 연락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기다렸었고, 준비했던 시합이었다. 긴장이 많이 됐었나.
▲아니다. 링 위에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일반 시합보다 이번 대회가 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난 가메다 고키를 7,8년 전부터 봐왔다. 그 선수와 대결하고 싶은 마음에 고키가 뛴 경기의 비디오도 열심히 봤었다. 그런데 실제 상대해보니 실력이 예상 밖이었다. 고키 선수가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한다.
―가메다 고키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경기가 안풀렸다’라고 말했다.
▲가메다 고키 외에도 외국 선수들과 시합을 치를 때보면 상대 선수들이 경기 전에는 나를 만만하게 본다. 체격이 왜소해서 그런지 몰라도 쉽게 생각하고 링에 올랐다가 당황하는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번에 고키 선수도 그런 듯했다. 마치 늪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라. 그런 표정을 보니까 더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사실 이번 대회는 참으로 독특한 환경으로 치러졌다. 한국에서 치르는 대회를 일본 프로모터(가메다 프로모터, 가메다 고키의 아버지 시로 씨가 회장이다)가 주관하고, 방송도 가메다의 스폰서인 일본 TBS가 중계(한국에선 채널A 생중계)했다. 7차방어전까지 일본에서만 치른 가메다 고키를 향해 ‘안방챔피언’이란 불명예가 따라다닌 상황에서 이를 씻어내고자 약한 상대인 손정오 선수를 지목했다고 들었다. 즉, 이 경기는 KO승을 거두지 않는 한, 판정으로 가선 이기기 어려운 경기였다는 점이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관장님한테 이런 말씀도 드렸다. ‘설령 판정으로 지더라도 경기 내용면에선 지고 싶지 않다’고. 판정으로 가면 완벽하게 이기지 않는 한, 챔피언 벨트를 뺏어오기 어려웠다.
―10회 한 차례 다운을 시킨 이후 공격면에서 약간 주춤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건가.
▲지금 처음 밝히는데, 눈에 문제가 있었다. 이 시합을 앞두고 훈련하면서부터 시력에 이상을 느껴 안과 진료도 받곤 했는데, 10회 이후 갑자기 사물이 두세 개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지금 기자님 눈이 네 개로 보일 정도이다. 그 증상을 느끼면서 공격을 제대로 못했다. 잘못했다가 점수를 더 까먹을 것 같아서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왜 안했나.
▲경기 전에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고키 선수가 악이용할 것 같아서 끝까지 숨겼다. 그리고 경기 후에는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 경기를 치렀든 진 건 진 것이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세계챔피언 타이틀 매치에 도전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 차례 은퇴했다가 복귀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해서 비인기 종목인 복싱을 시작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나도 처음엔 취미 삼아 복싱체육관을 찾았다가 선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당시 프로 테스트를 보면 운전면허증처럼 자격증이 나오는데, 그 자격증을 손에 쥐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5가지 소원이 있었다. 야구선수, 프로레슬링선수, 직업군인, 경찰, 그리고 복싱선수였다. 만약 초등학교 때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더라면 난 야구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제일 처음 접한 운동이 복싱이었고, 프로테스트에 통과했고, 그 후엔 신인왕을 목표로 운동했고, 운 좋게 신인왕에 오른 다음에는 한국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한국챔피언에 오른 후 자연스레 세계챔피언의 꿈을 키운 것이다.
―처음엔 밴텀급이 아닌 플라이급에서 시작을 했더라.
▲플라이급에서 시작했지만, 상대할 선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슈퍼플라이급으로 올렸는데 가메다 고키를 보고 밴텀급으로 체급을 바꿨다.
―당연히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 힘듦이 어느 정도였나.
▲대부분의 복싱 선수들은 ‘투잡’ ‘쓰리잡’을 하며 선수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다보니 정작 힘을 써야 하는 경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곤 한다. 그래서 난 땡전 한 푼 없어도 오로지 복싱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일념에 한남체육관 옥탑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에 매달렸다. 주말에 천안 집에 내려갈 때마다 관장님께서 용돈을 주셨는데, 그 돈 받아서 휴대폰비 내고, 차비하고 그랬다. 당시 옥탑방에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함께 기거했었다. 그 동생들은 집에서 용돈 받아서 생활을 했던 터라 큰형뻘이었던 내가 어린 동생들 용돈으로 간식 사먹곤 했었다. 참으로 비참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2008년 은퇴를 했던 건가.
▲시합은 자꾸 무산되고,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를 기회는 도통 없는 것 같고….복싱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체육관을 나왔던 것이다. 천안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일하며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일했던 체육관 관장님이 그곳을 떠나시면서 나한테 싼 가격에 그 체육관을 넘기셨다. 은행 대출 왕창 받아서 체육관을 인수했고, 지금은 동생이랑 천안에서 두 군데 체육관을 내었고, 경제적으로 조금은 안정을 찾은 상태다.
―하는 일이 체육관이라 다행이다. 식당이었으면 복싱선수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정확히 보셨다.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운동을 시작했고, 시간이 빌 때마다 개인 훈련을 하게 됐다. 몸이 만들어지는 걸 느끼면서 복싱에 미련이 생겼고, 결국엔 다시 링 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번 가메다 고키와의 대결 외에 무려 11개월 전에 경기를 치르고 그 후 한 차례도 시합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게 한국 복싱의 현실이다. 국내 경기는 나 같은 커리어의 선수가 시합을 해도 대전료가 200만 원이 전부다. 거기서 선수 몫으로 돌아오는 돈이 100만 원 정도다. 그걸 갖고 1년을 버티는 것이다. 그래도 난 나은 편이다. 몇 십 만 원의 대전료를 받고 시합을 뛰는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니다. 그것도 1년에 한 번!
―가메다 고키와의 시합에선 어느 정도의 대전료를 받았나.
▲세계타이틀매치이다 보니 대전료가 세다. 1500만 원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키는 약 20여 억 원의 대전료를 받는 걸로 알고 있다. 고키는 31승 1패 17KO라는 어마어마한 전적을 자랑하는 선수다. 한마디로 일본 복싱의 영웅으로 10여년 간 세계챔피언으로 군림하고 있다. 고키 외의 두 형제들도 세계챔피언으로 활약 중이다. 일본 복싱계에서 가메다 집안은 전설로 내려올 정도로 아주 유명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20여억 원 대 1500만 원이라니…. 대전료가 하늘과 땅 차이의 수준이다. 참, 손정오 선수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계기가 고 최요삼 선수의 스파링 파트너로 뛰면서부터 아닌가.
▲최요삼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난 신인왕 출신이었고, 선배는 세계챔피언이 된 상황이었다. 천안에서 훈련하다가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가 스파링파트너를 했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인간 샌드백 수준이었다. 얼마나 맞았던지 정신이 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삼 선배가 날 좋아했던 게 아무리 때려도 맞을지언정, 결코 쓰러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서서 버텼다. 시간이 갈수록 나도 방어를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간극을 좁혀 들어갔다. 요삼 선배가 평소 나한테 해주셨던 말씀이 있었다.
―그게 어떤 내용인가?
▲‘정오야, 나 다음에 경량급에서는 네가 세계챔피언이 될 것이다’란 말씀이었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고. 요삼 선배가 살아계셨더라면 가메다 고키와의 경기를 직접 와서 응원해주셨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내가 더 힘을 내서 잘 했을 텐데…. 결국엔 선배의 바람처럼 세계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가메다 고키 경기 전까지만 해도 26전20승6KO4패2무였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잊지 못할 경기를 꼽는다면, 어느 경기인가.
▲2001년 신인왕에 올라 최고의 유망주로 떠오른 시절, 인도네시아로 원정 경기를 떠났었다. 에니스 로가란 선수였는데, 한국에서 들은 그에 대한 정보는 인도네시아 유망주라는 거였다. 한국의 유망주와 인도네시아의 유망주가 맞붙는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 대전을 수락했고, 관장님과 둘이서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방송국 안에 설치된 특설 링에서 경기를 치르는데, 현지인들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난타전을 벌인 끝에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어느 정도의 난타전이었냐 하면, 경기 후 소변을 보는데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왔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인도네시아 유망주로 알고 상대했던 에니스 로가가 IBF 인터콘티넨탈 라이트플리이급 챔피언이자 세계 랭커였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신인왕이 월드 클래스에 오른 선수를 유망주로 알고 상대해서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얘기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지, 한국에서 경기를 주선한 분들의 정보 부족이 가져온 코미디였지만, 문제는 에니스 로가가 무승부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재대결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재대결을 펼쳤나.
▲당연히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관장님이 집안 일로 동행하지 못하시고, 나 혼자 인도네시아를 찾았다가 2-1로 패했다. 그때도 경기는 일방적으로 내가 우세한 상황으로 끌고 갔지만, 심판 판정은 챔피언의 손을 들었다. 하도 그런 일을 당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난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경기도 있었나.
▲2005년 가을, 천안에서 서울의 한남체육관으로 소속을 옮긴 후 2006년 3월, 전주에서 필리핀의 강타자 페데리코 카투바이를 상대로 이적 후 첫 경기를 치렀다. 그런데 그 경기는 1라운드에서 맞고 다운당한 후 살짝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기억이 돌아온 게 8라운드 시작 때부터였다. 즉 2라운드부터 7라운드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경기를 치른 셈이었다. 8라운드 때도 다시 기억을 잃었다가 또 깨어난 게 경기 후 승리한 카투바이 선수가 날 번쩍 들고 빙빙 도는 순간이었다. 무의식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다보니 기본적으로 내 몸에 배어 있는 복싱 기술만으로 카투바이를 상대한 것이다. 당연히 패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진 거라 경기 후 속이 꽤 쓰렸었다.
―15년의 복싱 스토리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우리나라가 지인진 선수 이후 7년 여간 세계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손정오 선수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런 아픔을 갖고 있는 선수라 더더욱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복싱인들, 선배들, 관계자 분들, 많이 반성하고 노력하시길 바란다. 선수는 당연히 시합을 치르고 싶어 한다. 더 많은 링 위에 올라가 더 많은 선수들과 상대하고 싶다. 그러나 대회가 없다. 스폰서도 끊겼다. 프로모터가 대회를 유치할 상황도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세계챔피언이 나올 수 있겠나. 옛날, 복싱의 황금기를 떠올리며 과거에만 얽매이기에 복싱의 현실은 상상 이상의 암울함과 비참함을 안고 있다. 그래서 난 가메다 고키와의 경기에서 패한다면 더 이상 링 위에 오르지 않을 결심을 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복서로 살지 않겠다는 얘기인가.
▲앞으로 또 다시 세계타이틀매치를 기다리며 훈련만 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나이도 있고, 체육관도 돌봐야 하고. 가메다 고키가 재대결을 요청해온다면 몰라도 그 외엔 복싱선수로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손정오, 어머니 그리고 동생 손정수 씨(왼쪽부터)와 기념촬영을 했다. 육상 선수 출신인 어머니는 아들이 더 이상 복싱선수로 생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나도 생활고를 겪으며 힘든 환경 속에서 운동을 했었다. 그러나 세계챔피언이 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방황은 했을지언정,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후배들한테는 말만 앞세우는 선배가 되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는 세계챔피언이 돼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 세계챔피언이 될 자신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 나가고, 자신이 없다면 깨끗이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손정오와의 인터뷰에는 동생 손정수도 동행했다. 손정수 또한 세 차례나 한국챔피언에 오른 복서 출신이고, 손정오-손정수는 복싱계의 ‘형제 복서’로 유명하다. 그런 관계이기에 동생 손정수가 보는 형 손정오의 모습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다음은 손정수의 이야기이다.
“형의 전성기는 2006년, 2007년이었다. 그 당시에도 여러 차례 세계타이틀 매치가 열릴 뻔 했다가 무산되곤 했었다. 이번 가메다 고키 경기를 보면서, ‘만약 형이 6,7년 전에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렀더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번 대결이 성사되면서 4개월 준비하고 나온 건데, 서른두 살의 복서가 넉 달 준비해서 이 정도의 경기를 해보인 건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난 세계챔피언이 될 자신이 없어서 한국챔피언에 만족하고 선수 생활을 접었지만, 형은 단 한 번도 세계챔피언의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가메다 고키와의 경기를 끝으로 그 꿈을 접은 것 같다. 그래서 패한 아픔보다 형이 더 이상 링에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이 쓰리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