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이종찬 서울고검장의 이임식을 지켜보는 검찰직 원들의 표정이 착잡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불꽃튀는 언쟁 속에 가려졌지만 이날 강금실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토론’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을 했다. 강 장관은 “3일 저녁 김각영 총장과 협의했는데, 김 총장이 고검장으로 천거한 사람 가운데는 고문치사로 책임져야 할 인사와 이용호 게이트, 옷로비 사건 등과 연루된 인사가 있어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밝힌 것.
이번 토론을 지켜본 뒤 대검의 한 관계자는 “토론 결과 노 대통령은 승리로, 평검사들은 무승부로 그나마 승점 3점, 1점씩이라도 챙겼으나 시합에 참가하지도 않은 검찰 간부들은 완벽한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노 대통령에 의해 “그대로 놔두고 갈 수 없는” 개혁 대상으로 낙인 찍힌 검사장급 이상(사시 13~17회) 검찰 수뇌부들의 심경은 참담함 그 자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분위기 탓인지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선배 기수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물러나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오해없기 바란다”고 언급했다.
강 장관이 당초 10일 발표하기로 했던 고검장급 인선 내용 역시 파격적일 수는 있으나 ‘경천동지’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강 장관이 토론에서 한 발언으로 미뤄볼 때 ‘노무현 검찰 개혁’의 대상이 누군인지는 대충 파악이 되었다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견해다.
노 대통령과 강 장관의 뜻은 간부급 인사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 색채가 옅은 최소한의 인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물갈이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인사를 이번 인선에 포함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검찰 파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것은 고검장급 승진 인사 4명에 대한 강 장관과 김 전 총장의 현격한 견해 차이였다. 김 전 총장은 사시 14회와 15회를 각각 2명씩 천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강 장관은 이를 일축하고 14회와 15회 각각 1명, 그리고 16회에서 2명을 낙점했다.
얼핏 검찰의 반발은 16회에서 고검장급 간부가 나올 경우, 현재 검사장급에 머물고 있는 13~15회 간부들 중 최소한 10~15명 정도는 옷을 벗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위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비쳤다.
▲ 김진환 대구고검 차장(왼쪽)과 유창종 서울지검장. | ||
강 장관이 김 전 총장의 건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은 그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김 전 총장이 추천한 인사들 대부분이 지난 정권에서 각종 정치적 게이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이었다는 것이 강 장관측의 설명이다.
강 장관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른바 ‘4대 사건’은 김대중 정권 5년 내내 검찰을 파란으로 몰고갔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 사건은 이명재 검찰총장을 낙마시키며 정권 말에 대대적인 인사 이동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 사건의 지휘선상에 있었던 김진환 서울지검장은 대구고검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찰 내 ‘빅4’로 일컬어지는 법무부 검찰국장과 서울지검장을 거치며 사시 14회의 선두주자로 나섰던 김 차장은 때아닌 날벼락으로 결국 사시 기수로 따져 4회 후배들이 포진하는 지방 검사장급으로 좌천된 것. 정현태 당시 서울지검 3차장도 역시 한직인 광주고검 검사로 전보됐던 바 있다.
검찰내에 최대 파란을 몰고왔던 ‘이용호 게이트’에도 많은 검사 간부들이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사시 13회의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하던 김대웅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아태재단 상임이사 이수동씨에게 수사 상황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아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 7일 끝내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직을 끝으로 결국 사표를 냈다.
사시 14회인 유창종 서울지검장도 이용호 게이트로 인해 큰 홍역을 치렀다. 유 지검장은 대검 중수부장 재직 당시 이용호 게이트 부실 수사 논란으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이라는 사실상의 좌천성 인사조치를 당했다. 그는 피의자 사망 사건으로 김진환 서울지검장이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다시 복귀했다.
동기인 이범관 광주고검장도 이 게이트에 연루된 의혹을 받았다. 이 고검장은 서울지검장에 재직중이던 당시 로비스트로 알려진 고교동기 이형택씨와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만남을 주선한 장본인으로 특검팀 수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이 고검장은 지난해 8월 광주고검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당시 신 전 총장의 동생 승환씨와 접촉했다는 구설수로 인해 특검팀 조사를 받았던 이기배 광주고검차장(사시17회)은 현재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재직중이다. 박종렬 법무부 법무실장은 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중이던 2001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홍일씨와 제주도로 휴가를 함께 갔다는 사실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일선 검사들로는 당시 수사보고 체계 라인에 있었던 명동성 인천지검 차장(당시 수사기획관)과 김준호 서울고검 부장검사(당시 중수3과장) 등이 특검팀 조사 대상에 오른 바 있다.
지난 99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옷로비 파문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연루된 검찰 관계자들은 대부분 옷을 벗었다. 다만 아직 현직에 있는 간부급으로는 옷로비 사건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이었던 김규섭 수원지검장(사시15회)이 있다. 김 지검장은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당시 목포고 선배인 신동아 로비스트 박시언씨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이번에 전격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김각영 전 검찰총장 역시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 수사 때 사령탑의 위치에 있었다는 전력이 항상 걸림돌이었다.
검찰 내에서는 한때 “검찰 간부들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안된다”며 격앙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물의를 일으키거나 연루된 인사들은 제외시키겠다는 방침에 대해서는 딱히 대응할 명분이 없다는 쪽으로 기류가 점차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