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에도 “더 오른다” 양치기 소년에 당했다
최근 3년 국내 주식형펀드 평균 수익률은 1.27%로, 기준으로 삼는 코스피200의 6.03%에도 한참 못미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일요신문 DB
그런데 따지고 보면 펀드매니저만 탓할 게 아니다. 펀드를 판매하는 증권사나 은행 탓이 먼저다. 2004년 1월 이후부터 펀드자금 유출입 현황을 살펴보면 코스피가 오른 후 많은 돈이 들어오는 현상이 뚜렷하다. 뒷북을 쳤다는 뜻이다. 쌀 때 사고, 비싸지면 팔아야 수익이 나는 게 투자의 대원칙인데, 시작부터 어긋난 셈이다. 투자자가 펀드를 운용하는 대가로 펀드매니저에 지불하는 운용보수보다, 펀드를 판매하는 증권사와 은행 등에 지급하는 판매보수가 더 높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펀드매니저는 “판매사들이 돈을 모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장밋빛 전망이다. 주가가 오르면 더 오를 것이라며, 주가가 떨어지면 반등할 것이라며 투자자들을 유혹한다. 특히 주가가 오를 때는 투자자들이 이 같은 장밋빛 전망에 더 잘 넘어가는 것 같다”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예측에 기반하지 않다 보니 이 같은 장밋빛 전망은 틀릴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 2007년 가을이다. 코스피는 이때를 정점으로 2008년 말까지 하락기에 접어들지만, 사상 처음으로 코스피지수 2000을 목격한 투자자들은 불나방처럼 펀드로 몰려들었다. 증시 역사상 가장 많은 펀드 자금이 시장에 유입된 때다. 여기서 눈 여겨 볼 대목이 외국인이다.
2004년부터 추이를 보면 외국인과 펀드자금 유출입이 같은 방향성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2007년 10월부터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발발 전까지 외국인들은 몰려드는 국내 펀드에 보유 주식을 내다팔고 한국을 떠났다. 또 2009년 초 외국인 자금 유입으로 시장이 급반등할 때 펀드자금은 오히려 증시를 떠났다. 2007년과 2008년 증권사와 은행에 속았던(?) 학습효과 때문이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 스토리와 꼭 닮았다.
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시장이 꼭지가 보이는 데 돈이 많이 들어오면 매니저로서는 속수무책이다. 들어온 돈을 그대로 현금으로 들고 있으면 자본시장법 위반이다. 비싼 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주식을 사야 한다. 반대로 시장이 오를 것으로 보이는 때는 환매가 발생한다. 뻔히 더 오를 줄 알면서 주식을 팔아야 한다. 이러니 수익률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고 털어놨다.
한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국내 증권사나 은행에서 해외펀드를 담당하는 인력들을 보면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최소한의 학습과 경험도 없는 이들이 수천억 원, 많게는 수조 원의 자금을 주무른다고 생각하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고 고백했다.
이 때문에 결국 공모형 펀드 시장은 그냥 시장흐름에 돈을 맡기는 상장지수펀드(ETF)에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대신 펀드 시장은 사모펀드와 위험관리펀드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사모펀드의 경우 펀드 자금유출입이 제한되고, 규모도 안정돼 펀드매니저의 운용능력이 수익률에 제대로 반영되는 장점이 있다. 또 투자자가 불특정 다수인 공모형보다 투자자 수가 제한되는 만큼 판매자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헤지펀드의 경우 이론적으로 주가 하락시 공매도로 대응할 수 있어 위험 관리능력이 일반 펀드보다 뛰어나다. 실제 최근 한국형 헤지펀드 수익률은 일반 주식형펀드보다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를 지낸 한 인사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모아, 묻지마 투자 식으로 운용하는 공모형 펀드의 시대는 판매사들의 배만 불린 채 저물었다고 봐야 한다”면서 “투자자들의 스타일에 맞춘 맞춤형 펀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펀드도 이젠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변화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4일 사모펀드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사모펀드 종류의 단순화, 사모펀드의 진입·설립·운용·판매 규제의 대폭 완화 등이 골자다. 심지어 사모펀드만을 운용하려는 회사는 요건만 충족하면 등록만으로 설립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이 같은 제도 정비를 통해 사모펀드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증권 이철호 연구원은 “사모펀드 활성화를 통해 시장의 깊이와 폭이 넓어질 경우 금융투자업계의 차별화된 상품 제공 기반이 확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