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당종파 제거’ 그것은 김일성 특기
김일성은 반대파뿐만 아니라 친인척까지 수용소로 보내는 공포정치를 통해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히 했다. 작은 사진은 김정은. 연합뉴스
김무정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후 그는 사망 때까지 줄곧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 핵심부와 관련을 맺었다. 1926년 상하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의 장시성으로 모여들어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인 ‘루이진 소비에트’를 세우고 홍군을 창설했을 때, 그도 이곳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있었다. 그는 1934년에 시작한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당시 장정엔 30여 명의 조선인들도 참여했는데 김무정은 장정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조선인이다. 다음해 안착한 공산당의 피난 수도 연안에서 그는 팔로군(홍군의 후신) 포병대 사령관과 포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일설엔 그가 펑더화이의 부관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후 그는 연안에서 창설된 조선의용군의 사령관으로 추대되는 등 연안파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해방이 되고 김무정이 연안파를 따라 북한으로 귀국하자 그런 그에게 김일성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를 제거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김일성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평양 방어 명령을 어기고,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자에 대한 즉결처분을 행했다는 이유로 그를 숙청했다. 김무정은 숙청 후 죄수부대에 편입됐으나 중국 측의 요청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지금까지도 북한 주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또 다른 숙청사건이 있다. 바로 1956년 ‘8월 반당 종파’ 사건의 핵심자인 최창익 부수상을 비롯한 ‘연안파’ 숙청이다. 최창익은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나온 엘리트로, 국외 독립운동에 있어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평가받았다. 국내에서 박헌영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면 해외에선 많은 청년들이 그의 이론을 공부하고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을 만들기도 하고, 김무정, 김두봉 등과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만들기도 했다.
1956년 최창익은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간 사이에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와 함께 김일성의 일당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일로 그를 비롯한 수백 명의 관련자가 감금되자 중국과 소련이 항의해왔고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이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그뒤 약 1년에 걸쳐 최창익은 물론 수많은 연안파가 숙청당했다. 최창익은 평양감옥에서 병사했으며, 함경도에 살던 그의 사촌과 육촌은 모두 체포돼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김두봉은 소 사육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죽었고, 김원봉은 보위부 감옥에서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했다고 한다. 이 일의 여파로 1955년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남로당의 거두 박헌영도 처형됐다. 연안파에서는 2명만이 살아남았다. 최창익의 처 허정숙은 민족변호사 허헌의 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건졌다. 허헌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신간회에도 참여하는 등 명성이 높았다. 허정숙 자신도 미국에서 공부한 신여성이었다. 또 한 명의 연안파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의 2인자 저우언라이의 사위로 당시 중국에 나가 있었으므로 변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김일성 일가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친인척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방식을 통해 공포정치를 실행하고 1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해왔다.
신상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