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가 ‘불통’ 뚫었다
지난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08학번 주현우 씨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한 대자보. 주 씨의 대자보가 SNS를 통해 확산되며 화제를 일으키자 여고생들이 교정까지 직접 찾아와 구경하고 있다. 구윤성 기자
청와대 한 고위 인사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허니문이라고 하는 집권 1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외교 등 여러 부문에서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은 것은 ‘과’뿐”이라면서 “야당의 협조가 없었고, 국민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다 핑계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민심의 소리를 듣는 데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밀봉인사’로 일컬어지는 인사 잡음으로 문을 열었던 박근혜 정부는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권력기관 대선개입,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식과 같은 논란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만신창이가 됐다. 최근 벌어진 의료 민영화 논란과 철도 파업 등은 악화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이처럼 사고 뒷수습에 한 해를 허덕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요즘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동안 위기에 빠질 때마다 ‘정면 돌파’를 외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전언이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현상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고 난 이후부터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지금 풀어야 할 사안들이 많지만 대자보를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박 대통령 역시 적잖은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대응을 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선 “인사할 때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대신 다른 것을 쓰자”는 웃지 못 할 얘기까지 돈다고 한다.
청와대가 대자보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성격이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에 반대하기 위한 광우병 촛불집회와 흡사한 까닭에서다. 고려대학교 08학번 주현우 씨가 ‘안녕들하십니까’라는 평범한 인사말을 제목으로 내건 대자보를 내걸었고 이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전국 곳곳에서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신드롬’이라 부를 만하다.
지난 2008년 집회 현장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정주부를 비롯해 각계각층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었다.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 5년을 규정지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명박 정부 출신 인사들은 기자에게 여러 차례 “이명박 전 대통령 통치기간은 4년이었다. 촛불집회가 있었던 2008년은 잃어버린 1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정치권에서 공방을 벌이는 모습도 닮아 있다. 2008년 촛불집회가 확산되자 여당은 “배후에 야당이 있다”고 의심했고, 야당은 “순수한 촛불정신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반박한 바 있다. 대자보가 퍼지자 친박 핵심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야권이 개입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홍 사무총장은 “광우병 괴담이 퍼졌던 것처럼 근거 없는 민영화 괴담이 나오고 있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정치 공세’라며 일축하는 한편, 내심 대자보 확산을 은근히 바라는 분위기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젊은 층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 향후 대여 투쟁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야권은 2008년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를 발판으로 이명박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고 이는 2010년 지방선거 승리로 이어진 바 있다.
청와대는 대자보가 박 대통령 지지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꼼꼼히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박 대통령이 집권 초부터 지금까지 여러 정치적 고비에도 불구하고 강경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50~60%대의 안정적인 지지율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초반 정점을 찍고 임기 2년차로 접어들 무렵이면 두 자릿수 이상 빠진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이명박·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 50~60%대 지지율을 보였지만 2년차로 가까워질수록 20%로 급락했다.
철도노조원과 파업지지자가 지난 19일 서울광장에서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구윤성 기자
이에 청와대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11월부터 지지율이 조금씩 빠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자보가 그 하락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이명박 전 대통령 지지율은 촛불 집회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이 전 대통령이 촛불이라는 말만 나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며 “박 대통령은 대자보가 지지율 하락으로 연결될 것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어떤 식으로든 들끓고 있는 여론을 달래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상태다. 몇몇 참모들은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권력기관 대선개입 의혹 등에 있어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견해까지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최근 박 대통령이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개각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검토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평소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개각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왔다. 인적 쇄신만으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박 대통령의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개각 채비에 나선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청와대 복수 관계자들에 따르면 개각 시기는 정부 출범 2주년을 맞는 내년 2월이 유력하다고 한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중진 의원도 “내년 2월 개각을 하는 쪽으로 결론 났다고 들었다. 민심을 다독이고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집권 2년차를 맞아 효율적이고 일할 수 있는 정부와 청와대를 만들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여러 라인을 통해 개각을 청와대에 요구했다고 한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당에서 이대로 가다간 내년 지방선거가 위험하다는 뜻을 수차례 전달한 것으로 안다. 국민 통합형 개각을 통해 국면을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는 건 대부분 의원들 판단”이라면서 “지방선거에 차출될 장관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개각은 불가피한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관심사는 개각의 폭이다. 일단 청와대에선 비서관급 이상 절반이 물갈이 될 것이란 전망이 주를 이룬다. 청와대 내부 진용부터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장관의 경우 예닐곱 명이 교체 대상자로 오르내리고 있다. 올 하반기부터 경질설이 끊이지 않았던 현오석 경제부총리의 경우 바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청와대 내부에선 정홍원 국무총리 교체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총리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점에 비춰보면 다소 의외다.
윤호석 정치 평론가는 “총리 교체는 개각 폭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국을 돌파하려는 박 대통령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가 일각에선 벌써부터 박근혜 정부가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호남이나 충청권 인사를 후임 총리에 앉힐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총리 교체가 지방선거와 맞물려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