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생’이도 ‘갑’인 줄 아는 순간 천방지축
SK 애런 헤인즈(맨 오른쪽)가 지난 16일 KBL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코트에서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했다. 사진제공=KBL
외국인 선수의 황당 사례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리 벤슨이다. 벤슨은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고교 재학 시절, 손꼽히는 농구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지만 졸업하자마자 마약 거래와 총기 불법 소지로 인해 무려 8년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래도 실력만큼은 출중했다. 서울 SK가 2004년 야심차게 벤슨을 영입했지만, 그는 경기도 양지에 위치한 숙소를 보자마자 짐을 쌌다. “여기 숙소가 내가 머물렀던 감옥을 연상케 한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고 입단을 거부한 것이다.
트라우마가 있다는데, 여기에 비난을 가할 수 있을까. 국내 농구 관계자들은 벤슨이 개과천선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벤슨은 악동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2005년 인천 전자랜드의 유니폼을 입은 벤슨은 시도 때도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앙탈을 부려 구단을 힘들게 했다. 그 때마다 구단은 당근을 쥐어주며 벤슨을 달래야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해외 업무를 맡았던 관계자는 “벤슨이 계속 집에 가겠다고 투덜대기에 나도 화가 나서 그럴거면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구단이 마련한 보너스를 받더니 내가 언제 가겠다고 했냐며 시치미를 뗐다”며 황당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벤슨의 ‘코리안 드림’은 막장으로 끝났다. 벤슨은 한국인 여자친구를 만났고 결혼을 염두에 뒀다. 관계자들에게 귀화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묻기도 했다. 그러나 벤슨은 대구 오리온스로 옮긴 2006-2007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한국을 떠났고 구단과도 연락을 끊었다. 알고 보니 폭행 사태에 연루됐는데, 고소당할까 두려워 도망을 간 것이다. 벤슨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한기윤 전 전자랜드 통역은 “성선설을 잘 보여주는 예”라는 말로 그간의 고통(?)을 표현했다.
# “아버지, 나를 왜 이렇게 낳으셨어요?”
오랜 기간 통역 업무를 맡았던 한 농구 관계자는 “오히려 몸값이 높았던 자유계약 시절의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매너가 좋았고 연봉 1만 불 시대의 선수들 중에 진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외국인 선수들의 몸값이 낮았던 프로농구 초창기 시절에는 온갖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야반 도주 사례다.
1998-1999시즌 대구 동양에 그렉 콜버트라는 최정상급 외국인 선수가 있었다. 평균 26.3점, 11.6리바운드를 올리며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알고 보니 미국에 머물고 있는 부인과 연락이 안 되자 외도를 의심하고 구단에 통보 없이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뜬금없이 에이스를 잃은 동양은 그 시즌에 국내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최다연패 기록인 32연패 늪에 빠졌다.
야반 도주 사례는 또 있다. 버나드 블런트는 1999-2000시즌 개막을 앞두고 돌연 자취를 감췄다. 창원 LG는 ‘멘붕’에 빠졌다. NBA에 도전하러 가겠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블런트의 대체 선수로 온 마일로 브룩스는 더 가관이었다. 이충희 당시 감독에 항명하다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황당한 일화는 또 있다. 브룩스는 어느 날 연습을 하다 말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 전 죽은 형이 농구 골대 위에 앉아있는 게 보인다”며 괴로워했다. 한 관계자는 “지금 생각해도 섬뜩한 이야기다. 정말 뭔가를 본 것인지, 연습을 하기 싫어 그런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06-2007시즌에는 프로농구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가 영구제명 당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LG의 퍼비스 파스코가 부산 KTF(현 KT)와의 플레이오프 도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가격한 것이다. LG 관계자는 “파스코가 평소에는 착한데 승부욕이 발동하면 이상해지곤 했다”고 말했다. 파스코는 사고를 일으키기 전,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자 미국에 있는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 “대체 왜 나를 이렇게 낳으셨어요?”라고 푸념을 하기도 했다.
각 구단 해외 업무 관계자들과 외국인 선수들이 일으킨 황당한 해프닝을 주제로 대화하면 밤을 새우기 일쑤다. 과거 이상한 슛 폼으로 득점왕에 올라 인기가 많았던 안양 SBS의 데니스 에드워즈는 트레이너의 기피 대상 1호였다. 한 관계자는 “에드워즈는 징크스 때문인지 웬만해서는 발을 닦지 않았다. 테이핑이나 아이싱을 해주는 트레이너가 냄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며 웃었다. 깔끔한 매너로 인기가 많았던 안드레 페리는 술주정뱅이로 유명했다.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르커스 힉스는 호텔에서 화장실에 가기가 귀찮아 물통에 소변을 보고 그대로 방치할 때가 많았다. 방 여기저기서 노란 물(?)이 담긴 물통을 본 호텔 직원들이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외국인 선수는 연차가 쌓일수록 구단에 요구하는 내용과 횟수가 늘어나고 헤인즈의 경우처럼 안하무인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거 헤인즈가 뛰었던 구단의 한 관계자는 “헤인즈는 과거 착하고 성실한 선수였고 코트에서 매너가 가장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습경기 때 상대 선수에게 욕설을 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헤인즈는 이번 사태에 앞서 지난 2월 부산 KT의 김승기 코치에게 “개XX야”라고 욕설을 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외국인 선수들은 왜 변하는 것일까. 한 농구 관계자는 유럽 리그와의 차이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프로농구에 깊숙하게 박힌 성적 지상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은 우승에 도전하는 팀들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 돈이 많은 팀들이다. 대부분의 구단들은 운영 자체에 의미를 둔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용병이 진상을 부려도 나가라고 하면 그만이다. 돈이 많은 팀의 경우는 새로운 용병을 구하면 그만이다”라며 “국내 사정은 다르다. 10개 구단 모두가 우승을 목표로 뛴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좋은 외국인 선수를 구단이 갑으로 모시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특히 연차가 쌓이면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외국인 선수는 목이 뻣뻣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세운 CBS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