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기자회견중인 이회창 전 총재. 그는 불법 대선자금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겠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과정에서 이 전 총재가 대선자금 수사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자 노 대통령도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 다음날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의 국정혼란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 일각에선 ‘대 이회창 메시지’ 성격도 띤 것으로 읽히고 있다.
노 대통령과 이 전 총재는 지난해 12월19일 대통령선거 ‘사투’를 치른 지 꼭 1년 만에 다시 한번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창’의 ‘자진 출두’ 강수에 노 대통령도 특별기자회견을 가지며 ‘반격’ 채비를 갖추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 결과에 따라 둘 중 하나는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전투의 전말을 따라가봤다.
“아니, 이 시간에 또 무슨 기자간담회야. 에이….”
지난 12일 한나라당 기자실에서는 출입기자들의 불평이 이어졌다. 이재오 비상대책위원장의 갑작스런 ‘집합’ 명령에 퇴근을 목전에 둔 기자들은 마지못해 노트북과 취재수첩을 주섬주섬 챙긴 뒤 응접실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 위원장은 이내 ‘검찰의 편파수사’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아쓰기’ 하는 기자들의 손놀림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퇴근시간을 놓쳐버린 아쉬움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 위원장의 ‘공격’ 내용에 알맹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 총재 기자회견이 있기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런 ‘알맹이’ 없는 기자간담회가 한나라당에서 매일 열리고 있었다. 대선자금 수사에 관한 한 한나라당은 언제나 ‘고개 숙인 남자’였다.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회창 전 총재가 지난 15일 전격 기자회견을 가진 뒤부터 당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그동안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적이 많았는데 이 전 총재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당의 부담도 한결 던 느낌이다”고 말했다.
사실 이 전 총재는 지난 10월30일 SK 1백억원 사건과 관련하여 “모든 책임을 지겠다. 검찰이 소환하면 응하겠다”고 밝힌 뒤 45일 만에 검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대검에 찾아 들어갔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이 전 총재의 최측근 서정우 변호사의 구속으로 정점에 이르자 더 이상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해 대검에 출두한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 이회창 전 총재의 기습에 노무현 대통령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지난 9일 남극 세종기지에 격려전화를 하는 노 대통령. 사진제공=청와대 | ||
하지만 이런 ‘순수한’ 시각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정치권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 전 총재 기자회견에 담긴 배경은 대략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이 커다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전 총재는 기자 회견문에서 ‘나’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난 대선의 후보로서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느끼는 당연한 책임의식이긴 하다. 하지만 회견문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난히 강조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할 진정한 ‘해결사’는 바로 이 전 총재 자신뿐이라고 ‘읍소’하고 있다.
이는 곧 아직까지도 한나라당을 대표하는 진정한 ‘총재’는 바로 자신임을 은연중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읽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청와대 시각대로 정계복귀로 이어질 것인지는 차후의 문제지만 이 전 총재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한나라당의 ‘주군’으로서 강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이 또 다른 의미의 정치적 액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검 한 관계자의 해석은 이렇다.
먼저 이 전 총재가 강력하게 ‘사법처리’를 원하고 있지만 범죄 혐의가 없는 사람을 억지로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전 총재는 대선자금 전모에 대해 서정우 변호사로부터 그의 구속 바로 며칠 전 ‘급하게’ 보고 받은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당 관계자들이나 이 전 총재 측근들도 “후보는 ‘돈이 모자란다’는 정도의 보고는 받았을지 몰라도 세세한 내역은 전혀 모를 것이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문효남 대검수사기획관도 15일 이 전 총재를 조사하고 난 뒤 “(이 전 총재가) 의미 있는 단서를 갖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수사팀은 ‘이 전 총재가 전모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을 놓고 볼 때 이 전 총재는 대선자금 규모에 대해 완전하게 파악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전 총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앞서의 대검 관계자는 “어떤 범죄든 특정한 혐의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받았는지 혐의 사실이 특정되어야 한다. 포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기소할 여건이 안된다. 기소를 하더라도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소하기 위해 일일이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과 맞추어봐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법관 출신인 이 전 총재가 이런 법리적 ‘상식’을 모를 리 없다. 자신이 감옥에 가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기소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범죄자’가 될 수 없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이 위기의 당을 온몸으로 구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구속은 면하는 ‘정치적 액션’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검찰 주변의 해석이다.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라는 해석도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전 총재는 회견문을 작성할 때 “(자금 모금을) 내가 시켜서 한 것”이라는 문구를 꼭 넣을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종구 전 특보가 이 문구가 차후 이 전 총재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며 뺄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이 전 총재는 ‘이걸 빼면 문제가 안 풀린다’고 해서 억지로 삽입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재가 이 문구 삽입을 고집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전 총재 자신이 지난 대선의 불법 자금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듯이 상대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 ‘책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리다. 비록 이 전 총재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할 태세다.
한나라당의 핵심 관계자 A씨는 이와 관련해 “당은 이제 검찰 수사에 대한 형평의 원칙을 주장해야 한다. 이 전 총재가 구속된다면 노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10분의 1이 아니더라도 ‘오십보 백보’ 아닌가. 누가 그런 원칙을 정했나. 이런 점에서 노 대통령 ‘10분의 1’ 발언은 굉장한 실수다. 또한 이 전 총재가 감옥에 가면 온갖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정국의 변화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또한 이 전 총재의 검찰 출두는 청와대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변수’였다는 후문이다. 이 전 총재는 이런 ‘기습공격’을 통해 앞으로 닥칠 대선자금 수사 정국에서 선취권을 쥐고 주도적으로 난국을 헤쳐나가겠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 총재가 ‘성향상’ 검찰 수사에 끝까지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예상을 뒤엎고 검찰에 전격 출두했다. 대선자금 수사 정국에서 자신이 ‘종속변수’로 내몰려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주체가 돼 정국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반격’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그렇게 빨리 기자회견을 가지는 것도 이 전 총재의 ‘노통 압박’ 수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여론이 노 대통령의 책임론으로까지 급격하게 옮겨가자 청와대가 이 전 총재 기자회견 다음날 특별기자회견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 회견에서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 뒤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대선자금 정국에 대해 명확한 입장표명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 전 총재의 ‘살신성인론’에 대응할 자신의 의지도 분명히 밝힐 것으로 보인다.
이번 두 사람의 ‘전투’는 누가 이기든지 간에 ‘상처뿐인 승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는 ‘그들만의 싸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