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광역 지방자치단체장 중 손꼽히는 스타로 경남 내에서는 ‘대통령 못지 않은’ 인기와 권한을 누려온 김혁규 전 경남지사의 한나라당 탈당(15일)으로 영남권 판도변화가 거론되면서 빚어진 일이다. 당장 여권은 김 지사의 ‘용단’에 고무돼 전방위 공세에 나섰다. “내년 총선에서 영남권에서만 30석을 차지할 것”(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라는 다소 성급한 낙관론까지 제시되고 있는 터다.
반면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한나라당은 여권의 시도를 ‘공작정치’로 규정하며 국회 본회의까지 팽개치며 장외집회를 여는 등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편에서는 “2000년 총선 때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의원 36명을 빼가고도 대패했다”(홍준표 의원)며 자신감을 보이지만 여권 핵심부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질 것이란 점에서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여야의 사정을 한꺼풀 벗겨보면 외형적인 현상과 다른 기류가 감지된다. 영남권 공략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여권에서는 총선 전망을 어둡게 보는 시각이 꽤나 널리 퍼져 있는 반면 수세 국면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한나라당 내에서는 오히려 작금의 상황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영남 대란설’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잡다단한 이해득실을 분석해 봤다.
여권은 최근 상황에 “지역감정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장영달 우리당 조직위원장)는 평가와 함께 조만간 김 전 지사 입당·개각을 계기로 대대적인 ‘영남 상륙작전’이 벌어질 것임을 밝히고 있다. 작전의 뼈대는 청와대-내각의 경쟁력 있는 인사들에 대한 ‘징발’과 이강철 우리당 상임중앙위원과 김두관-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 등 노 대통령 핵심측근들이 전면에 나서 전직 장·차관, 의원과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등에 대한 추가 영입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김 전 지사가 핵심역할을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들은 한결같이 ‘인물 수혈’에 대한 강한 자신감, 내년 영남 총선의 밝은 전망을 강조하며 우리당 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두관 전 장관은 “경남의 경우 이전까지 4.5 대 5.5로 우리가 한나라당에 뒤졌었는데 김 전 지사 탈당 이후 전세가 일거에 역전됐다”며 “PK(부산-울산-경남)는 분위기가 좋아 우리당 후보가 영남 65석 중 30석, 경남 16석 중 9석은 차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이강철 위원도 “경남에서 우리당 바람이 불어 부산으로, 대구-경북으로 확산될 것”이라며 내년 총선에서 ‘붐’ 확산을 위해 1·11전당대회에서 영남권 중진들과 김 전 지사가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 의장 출마를 공식선언한 김정길 전 장관 역시 “내년 총선에서 가장 큰 변화는 영남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가세하고 나섰다.
외부 영입경쟁도 불을 뿜고 있다. 이강철 위원은 이미 사의를 표명한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과 권기홍 노동부 장관, 이영탁 국무조정실장 등의 영입계획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나섰다. 그는 또 PK지역에서도 이미 입당교섭이 거의 완료된 정해주 진주산업대 총장과 공민배 전 창원시장에 이어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 등도 후보군으로 거명하기도.
김정길 전 장관도 최근 노 대통령의 우리당 입당 시기와 ‘징발령’에 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21일 제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내년 설날 전에 입당하고 강금실 법무장관이 서울,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부산에서 출마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록 ‘희망’ 형식으로 언급했지만 김 전 장관이 줄곧 노 대통령과 정치적 행로를 같이 해와 ‘노심’(盧心)에 정통하다는 점에서 간단히 넘어갈 대목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장밋빛 일색 전망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조성래 우리당 부산창당준비위원장은 “솔직히 지금으로선 부산에서 내년에 자신있게 당선될 것이라 얘기할 만한 데가 한 곳도 없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의 한 원로급 핵심측근도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가면 내년 영남 총선에서 우리당에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지금은 김혁규라는 사람 한 명 꿔다 쓰는 차원이 아닌 특단의 종합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나섰다.
이들은 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하락의 여파로 정순택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등 우리당이 공을 들여온 인사들의 영입이 난항에 부딪힌 데다 그나마 영입에 성공한 이해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헌만 전 경찰청 차장 등도 ‘바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부진의 원인으로 꼽았다.
또한 상향식 공천이 적극 도입되면서 경쟁력 있는 명망가들이 당내 경선에서 신진들과의 ‘백병전’을 벌이는 데 주저하는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거론된다. 부산 여권 인사들 사이에선 “노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가 확대돼 그나마 별반 데미지가 없었던 부산 ‘친노’인사들이 다칠 경우 총선은 끝장”이라는 위기감까지 감돌고 있다.
‘영남권 대란설’에 대한 한나라당의 분석도 눈여겨볼 대목. 겉으론 장외투쟁까지 불사하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정세분석에 잔뼈가 굵은 인사들은 “여권의 시도는 결국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들은 김 전 지사의 탈당이 ‘우리당 바람’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현지의 광범위한 반발 속에 ‘제2의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변질될 것이란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박종웅 의원은 “당적 이동은 명분이 뚜렷하거나 확고한 세력을 갖추고 있을 때 파괴력이 있는데 김 전 지사의 경우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며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YS) 등 원로들이 뒷받침해주기는커녕 ‘망해가는 정권에 왜 따라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격렬히 비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권철현 의원도 “과거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당 저당 옮겨다닌 정치인 중 성공한 정치인이 몇이나 되느냐. 당장 김 전 지사 탈당 이후 며칠 사이에 경남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면 알 것”이라고 가세했다.
주목되는 것은 최병렬 대표 등 핵심부에서는 최근 상황을 ‘물갈이’에 적극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 대표와 김문수 당 대외인사영입위원장, 윤여준 당 여의도연구소장 등은 김 전 지사 탈당을 영남권 물갈이에 호재로 활용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구체적인 영입작업과 공천기준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뚜껑을 열면 상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원래부터 물갈이에 대한 여론지지가 높았던 데다 김 전 지사 탈당으로 보다 과감하게 물갈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 이제 공론화 시기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영남권 공천은 상당수 지역에서 경선 대신 단수로 후보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헌상엔 ‘당원 10%+국민 90%’의 완전 국민경선제를 규정한다 하더라도 영남권엔 경선제의 부작용을 감안, 여론조사 등 중앙당의 권한을 총동원하겠다는 것. 공천심사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 낙천자들의 무소속 출마나 ‘항명’여지를 주지 않고 당에 대한 기여도가 현격하게 낮은 중진이나 부정부패 연루자들은 최우선적으로 배제한다는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