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되든 남이 되든 ‘부담제로’
요즘 소개팅의 트렌드는 실속과 스피드다. 눈치 없이 질질 끄는 것은 금물이다. 간단한 식사나 차 한잔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상대에 대한 정보는 SNS를 통해 다 파악했기 때문이다. 영화 <연애의 온도>.
유 씨가 이토록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까닭은 바로 ‘짝’을 찾기 위함이다. 잠깐 그의 다이어리를 살펴보자. ‘금요일 저녁 7시, 신사동 가로수길 ㅇㅇ카페’ ‘토요일 점심 1시, 강남역 10번 출구’ ‘토요일 오후 4시, 애프터 예정’ ‘토요일 오후 8시, 동네 카페’ 등등. 주말만큼은 웬만한 한류스타 못지않은 스케줄이다.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뭘 모르는 소리란다. 유 씨는 “과거에는 소개팅이나 맞선을 보면 그 사람을 만나고 몇 번 데이트를 할 때까지 한 눈 팔지 않았다. 인연이 아님을 깨닫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서야 다른 소개팅을 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한 달 내내 주말마다 소개팅 약속이 꽉 차 있는 사람도 많다. ‘소개팅 어장관리’라고도 하지만 한 번에 한 사람씩 집중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유 씨처럼 ‘연속 만남’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찾는 일은 남녀불문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난해 어렵게 연애를 시작한 신 아무개 씨(30)는 그해 상반기에만 약 50회의 소개팅을 기록했다. 그는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에 허무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코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이처럼 한 사람에 집중하지 않는 문화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몇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선 한 번 정해진 날짜를 미루거나 약속시간을 변경하지 않는 게 최고의 매너가 됐다. 빈칸 없이 꽉 채워진 주말 일정 중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뒤에 있는 약속이 전부 어긋나기 때문이다. 눈치 없이 데이트를 질질 끄는 것도 금물이다. 대세는 스피드다. 몇 시간씩 걸려 장황한 코스음식이 나오는 곳보다는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인기다. 또한 식사 대신 차 한 잔만 마시는 것도 별 무례가 아니다.
소개팅 및 맞선 장소로 유명한 서울 강남의 S 카페 관계자는 “오후 2~3시나 8시 무렵이 피크다. 간단하게 음료만 시켜 서로를 탐색하다가 마음에 들면 음식을 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듯 보였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부분 계산은 남자가 하는데 음료만 시켰을 경우 여자들도 그리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눈치더라.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 거절하기도 쉽고. 한 달에 두세 번 상대를 바꿔 이곳을 찾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얼떨결에 아는 척을 했다가 난감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짧은 만남을 두고 ‘어르신’들은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니냐”며 다시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맞선이나 소개팅 할 것 없이 만남 전 이미 상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접수해 대부분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나가기 때문이다. 과거엔 주선자가 전하는 말과 사진 한 장이 전부였지만 이젠 SNS를 통해 상대방의 취미, 성격, 이상형까지 알아내 ‘맞춤형’으로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서인 애프터도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을 경우 수일 내로 연락을 주고받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1~2주 만에 애프터 신청을 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 상대를 비교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멀티 플레이’를 한 끝에 애프터를 한다고 해서 바로 연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썸남’(썸씽(something)+남(男)과 같은 의미로 약간의 관계가 있는 남자를 칭함) ‘썸녀’로 불리는 애매한 관계로 지내다 잘 되면 연인사이로 발전하는 수순이다. 만약 도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쿨’하게 친구로 남거나 오히려 상대를 통해 또 다시 소개팅 자리를 소개받기도 한다.
이런 요즘의 달라진 소개팅·맞선 문화를 두고 일각에서는 “인연을 너무 소홀히 한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나름 할 말은 있다.
“낚시대 한 개 드리우는 것보다 10개 던져 놓으면 대어를 낚을 확률도 더 높아지는 것 아니냐.”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