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들어 ‘성인 가출’이 급증하고 있어 사회문 제화할 조짐이다. 사진은 연출된 이미지컷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남편은 황당하다 못해 말문이 막힌다. 그렇게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부부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내가 집을 나가다니?
하지만 7년이나 함께 산 남편이 아내의 취향에 그토록 무지하다는 걸 안 순간 여자는 깨닫는다. 남편의 무관심과 함께 사랑이 아니라 습관으로 대체되어 버린 부부생활을 너무 오래 해왔음을.
몇 년 전 발표된 소설가 구효서의 단편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의 한 부분이다. 지금 우리사회 일각에선 흡사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쌓인 불만이 폭발해 집을 뛰쳐나가는 남편과 아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둔 김아무개씨(남·40)는 요즘 죽고 싶은 심정이다. 결혼 후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고, 별 불만 없이 알뜰살뜰 살던 아내가 2개월 전부터 갑자기 돌변하더니 끝내 집을 나가버린 때문이다.
가출 전 아내로부터 “나이 마흔에 능력이 겨우 그것밖에 안돼? 왜 그렇게 무능하냐”는 구박에 시달렸다는 김씨. 그러나 그는 “시시한 남편과 살기 싫고 애도 필요 없으니까 이혼하자”며 집을 나가버린 아내의 태도를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했다.
40대 중반의 공무원 이아무개씨는 “성격이 자상하지도 않고 성격도 안 맞는다. 이제 더 이상 보기도 싫고 같이 살기도 싫다”며 옷만 가지고 가출해 노래방 등을 전전하고 있는 아내 때문에 참담한 심경이다.
그는 뒤늦게 “아내에게 불만이 그렇게 많이 쌓인 줄 몰랐다. 내가 좀더 자상하게 해줘야했는데 애정표현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후회를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이씨는 요즘 “아내의 이혼 요구를 들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암 사망률 여성의 세 배, 과로사할 위험 최고, 최근 이혼율 급증, 가정과 사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뜬세대’이자 ‘사오정세대’가 오늘날 40대 한국 남성의 자화상이다. 각종 사회지표를 증명하듯 40대 남성은 스스로를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느끼는 통계도 있다.
IMF 이후 중·장년과 황혼이혼이 늘면서 이혼 위기를 절감한 40대 남편들은 ‘50대의 노후대책은 아내 지키기’라며 자조하고 있다. 불행히도 40대 남성의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설상가상 이젠 ‘가출로부터 아내 지키기’에 안간힘을 써야할 판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중년남편을 둔 아내 역시 남편 가출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소홀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40대 초반의 윤아무개씨는 보름 전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부부간 성격차이로 도저히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었다는 그는 “이제 애도 싫고 아내도 싫다”며 지친 표정이었다. “아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가방 싸서 나오던 날 본체만체하던 집사람의 무표정에 질렸다”는 윤씨는 “이제 이혼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다”며 체념했다.
회사원인 30대 중반의 한 남성은 “매일같이 이혼하자며 갖은 욕설을 퍼붓는 아내를 상대하기가 너무 피곤하다. 너무 괴로워서 출장 간다고 속이고 집을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고 고백했다.
남편 또는 아내 가출의 위험성을 알리는 경고음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특히 집 나가는 아이들보다 집 나가는 어른이 세 배 이상 많다는 경찰청 통계는 충격적이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9세 이상 전체 가출자 수는 6만4백99명. 이 가운데 성인(20세 이상) 가출자 수는 4만5천6백34명에 달했다. 한편 98년 2만 명 대에 이르던 성인 가출자 수가 2000년까지 3만 명 대에 머물다 지난해 4만5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불과 4년 사이 80% 이상 증가한 수치다.
그 가운데 가정을 가진 30~40대 연령층의 가출자 수가 남녀를 불문하고 압도적으로 많고, 주부가출자 수만도 2002년 한 해 동안 1만2천2백86명에 달했다는 것은 또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한 집안의 가장 또는 주부 가출은 곧바로 가정해체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2002년 상담통계 개요’에 따르면 가출이나 외도 등을 원인으로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부양청구를 원하는 30~40대 여성이 크게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0대 여성의 경우 2001년 7.5%에서 12.5%, 40대 여성은 11.3%에서 16.7%로 늘었다. 반면 ‘아내 가출’을 이유로 이혼상담을 한 남성 중 40대 이상 남성은 2001년 15.8%에서 지난해 21.1%로 증가했다.
▲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는 가출방지 혹은 가출인 귀가를 위한 부적들. | ||
“지난해 가출을 이유로 이혼 상담을 하러 온 사람이 여성 10명 중 1명, 남성 10명 중 4명 꼴이었다. 경제적 문제, 배우자의 외도, 가정폭력이 가출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 변화된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배우자 몰래 유흥비나 쇼핑으로 카드 빚을 지고 채무가 들통나 가출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다 남편과 갈등을 일으켜 가출하는 주부들도 종종 눈에 띈다. 남편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서 집 나왔다, 아내가 나를 무시하고 모욕해서 집 나왔다는 것이 가출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양화하는 가출 원인. 그로 인해 갈수록 증가하는 성인가출의 문제점과 심각성은 각종 상담기관과 인터넷 상담 사이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편이 빚을 지고 가출해 석 달 째 소식이 없는데 사용하던 휴대폰은 계속 꺼져 있습니다. 남편은 저 몰래 카드와 돈을 사용해 저는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도 모르는데 채권자는 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매일같이 집으로 독촉 전화를 합니다.”(30대 주부)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여기저기 노름빚을 지셨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그 빚을 해결하셨구요. 그런데 이제는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빚을 지고 잠적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20대 여성)
“9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가 됐고, 그 때문에 가정생활이 악화되자 아내가 첫돌인 아이를 두고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지금 와서 이혼을 하자고 합니다. 3년 전부터 사귀는 남자가 생겼다고. 아내가 아이까지 데려가길 원하는데 어찌해야 할까요?”(30대 남성)
“아내와 심한 언쟁 중에 뺨을 한차례 때렸습니다. 그 뒤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간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근 한 달이 될 무렵 이혼청구소장이 왔습니다. 그 사이 아이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건 알지만 이혼만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혼란스럽습니다.”(30대 남성)
한편 이혼 관련 법률상담 사이트에는 가출과 관련한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년 전 지방으로 간 남편이 생활비는 물론 연락도 끊었는데 이혼할 수 있나요?”
“취업차 외국에 나간 남편이 연락도 없고 행방을 알 길이 없는데 이혼할 수 있습니까?”
“남편이 5년 전 집을 나간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요?”
“간통한 아내를 고소했다 취하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다시 무단 가출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혼소송 및 간통죄로 고소할 수 있는지요?”
‘남성의 전화’ 이옥 소장은 “2001년 아내 또는 본인의 가출과 관련해 상담을 받은 남성은 총 2백55명으로 10명 중 1명 꼴이었다. 지난해는 가출 관련 상담자가 3백74명으로 2001년에 비해 40% 가까이 늘었다. 나이도 30~40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잠깐 집 나갔다 들어오는 주부가 많았지만 요즘은 이혼을 전제로 한 장기가출 여성이 많다. 며칠 있다 들어오겠지 하고 방심하다 이혼 요구에 당황하는 남편도 적지 않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해마다 성인 가출자 수가 늘고 있는 가운데 장기간 미귀가자도 적지 않아 가정해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4만5천여 명의 성인가출자 중 미귀가자는 1만7천 명에 가깝다.
가출기간이 길어질수록 가정붕괴 위험은 클 수밖에 없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를 예전처럼 무작정 기다리는 주부나 남편도 많지 않다. 심지어 아내가 가출 한 달 만에 이혼하겠다며 상담소를 찾는 경우도 있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담당자는 “성인 가출자 중 미귀가자가 많지만 가출 청소년과 달리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인권과 사생활침해 우려 때문에 가출자 신분을 공개하기도 어렵고, 범죄 관련자가 아닌 이상 휴대폰 추적도 할 수 없다. 설사 가출성인을 찾는다 해도 청소년처럼 강제귀가조치를 할 수 없어 가족이 찾고있다는 고지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금 인터넷 사이트에선 “가족 중 까닭 없이 가출하였거나 자주 가출하는 사람 등 가출을 예방하거나 가출자가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가출방지부적이 여러 종 등장해 팔려나가고 있다.
가출 관련 상담 관계자들은 수년 전부터 일본의 사회문제로 떠오른 ‘가장 실종’ ‘자발적 실종’ 조짐이 우리사회에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조만간 피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확대” 되기 전 ‘집 나가는 어른’들 발목을 붙잡을 확실한 대책을 강구해야할 것같다.
박은경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