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덮으려고? “응답하라 축구계!”
#수수방관하는 축구계
박은선. 사진제공=스포츠서울
한술 더 떠 “WK리그에서 그렇게 좋은 활약을 펼치는데 왜 여자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WK리그 감독들이 여자대표팀(감독 윤덕여)에 압력을 행사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시기는 작년 6월이었다. 모 구단이 두 차례에 걸쳐 여자연맹과 축구협회에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특정 선수(박은선)를 대표팀에 선발하든, 안 하든 이는 철저히 윤 감독과 축구협회 기술위원회의 몫이다. WK리그 감독들의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그런데도 축구협회 차원의 징계는 없었다. 감독들 중 한 명은 축구협회 이사 직함을 갖고 있다.
파장이 커지자 결국 간담회 간사인 이성균 수원FMC 감독이 논란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고, 고양 대교 유동관 감독이 추가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다만 유 감독은 ‘부진한 성적’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진전된 게 없다. 축구협회는 사태 직후인 11월 말 서 감독과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미팅은 없었다. 서 감독이 축구협회 최만희 기술교육실장과 한 차례 전화통화를 한 게 전부였다.
오히려 항간에선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서울시청이 계속 박은선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 몇몇 구단들이 공동 대응을 하겠다거나 모 구단은 이와 별개로 단독 대응을 하겠다는 등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루머가 나오는 실정이다.
그리고 여기서 분명히 해둬야 할 게 있다. WK리그 감독들이 여자연맹에 발송한 공문에 나와 있는 “2013년 12월31일까지 박은선 문제를 해결하라”는 문구다. 이들이 원했던 결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기간 내에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 이젠 WK리그 감독들 입에서도 뭔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유력 축구인들은 “사태를 이렇게 만들고도 마냥 뒷짐만 진 채 동계훈련을 하며 새 시즌을 대비하는 건 어른의 도리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적어도 여전히 팀을 이끌고 있는 WK리그 감독들이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더욱이 박은선은 아직 사태의 장본인들로부터 전혀 사과를 받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한 뒤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사과의 메시지를 받거나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다. “그 분들(WK리그 감독들)께서 사과를 하거나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락을 해왔을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11월 박은선 성별 논란과 관련해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맨 오른쪽) 등이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모습. 그후 석 달이 지났지만 문제 감독들은 박은선에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사태 직후 서울시청 구단주인 박원순 시장은 자신의 SNS 계정에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으로 박은선 인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글을 올렸고,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인권위)도 “축구협회에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공문을 발송했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시와 인권위 역시 문제 해결에 별 의지가 없어 보인다. 박 시장은 연말 박은선을 비롯한 서울시청 선수단을 불러 만찬을 겸한 격려의 자리를 마련했지만 이후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 구단주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구단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박 시장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작년 11월 6일 박은선과 관련한 서울시청의 진정서를 접수한 인권위의 발표가 계속 미뤄지는 것도 의문이다. 당초 올해 1월로 예정됐지만 이달 말이나 3월 초로 미뤄졌다. 사실 인권위의 결정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인권위는 최근 소위원회를 열어 “현대제철, 부산 상무, 전북 KSPO, 충북 스포츠토토 등 4개 구단 감독들의 진술서를 받자”는 의견을 여자축구계에 전달했다. 아직 최종 심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바뀌었다는 담당 조사관이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건 위안을 삼을 만하다.
서 감독은 “방황하다가 간신히 마음을 잡고 그라운드로 돌아온 (박)은선이가 다시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얼마 전 제주도로 동계 전지훈련을 다녀왔는데, 다른 팀과 연습경기가 잡힌 걸 알고는 ‘어떻게 그 사람들(WK리그 감독들)을 보겠느냐. 함께 내려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걸 간신히 설득해 데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사태가 해결돼야 마음 편히 축구에 전념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은선은 사태 이후 한동안 끊었던 페이스북 등 SNS를 최근 다시 시작했다. 그녀가 올리는 대부분의 글 속에 심적 고통이 반영돼 있다. 박은선의 가족들은 귀한 자식의 인권이 유린되는 걸 보며 법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지만 “인권위 발표가 나오고 모든 걸 뜻대로 진행하라”는 서 감독의 설득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다. 이제는 축구계, 그리고 이번 사태를 통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박은선에게 성실히 응답할 차례다. 물론 사태를 일으킨 지도자들의 어른답게 책임을 지는 자세도 함께 말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