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나무상자부터 순금 입힌 유골함까지… ‘저승 가는 길에도 등급 있더라’
지난해 화장률이 74%에 이를 정도로 화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사진은 서울추모공원과 서울시립승화원(아래)에서 유족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기 전 유족들은 ‘고별실’이라는 곳에서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조용히 종교의식을 치르는 유족들의 기도소리와 관을 붙들고 보낼 수 없다며 통곡하는 유족들의 울음소리가 섞였다. 5분간의 고별식을 마친 고인의 관이 화구로 들어갔다. 화구의 온도는 850℃에서 최대 1000℃까지 올라간다. 순간 유족들은 오열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주변의 지인들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결국 슬픔을 이기지 못한 유족 중 한 명이 혼절하고 말았다.
서울추모공원 노명은 주임은 “사고사나 자살과 같이 고인과 준비되지 못한 이별을 한 유족의 경우 경황이 없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경우도 마찬가지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족을 위해 휠체어나 심장박동재생기 등을 갖추고 있지만 간혹 응급차가 출동하는 경우도 있다. 유족들은 고인이 화장로로 들어가기 전인 고별실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곧이어 화장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화면에 붉은 글씨가 떴다. 화장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관이 들어가고 화장로의 문이 닫히면 화장로 안은 바람과 가스가 섞인 850℃ 이상의 불을 내뿜기 시작한다. 화장이 진행되는 10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유족들은 고인을 보낼 마지막 준비를 한다. 1시간 30분 후, 고인의 시신은 작은 봉안함에 담겨 수골실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유해를 태운 뒤 금이나 임플란트 추출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장례기사가 이를 수거해 유족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유해를 받아든 유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러나 장례식도, 영정사진도 없이 고별실이 텅 비어있는 경우도 있다. 임신부의 뱃속에서 죽은 사산아나 무연고자 시신을 화장할 때가 그렇다. 사산아의 경우 가장 마지막 화장시간에 화장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시간대에 추모하고 싶어 하는 부모를 배려하기 위함이다. 용인 평온의 숲 장례기사 김진석 씨(37)는 “가장 가슴이 아픈 순간이 사산아를 화장할 때다. 나 또한 아이가 있다 보니 조그마한 아이의 관을 보면 직접적으로 슬픔이 와 닿는다”고 털어놨다.
사산아의 관은 대부분 장례업체 대리인이 가지고 온다. 마지막 시간대에는 화장 중인 시신의 이름이 모두 똑같은 경우가 있다. 이름을 짓기도 전에 사망해 ‘무명씨’가 된 아이 대신 장례업체 관계자의 이름으로 화장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간혹 대리인 대신 부모가 올 때도 있지만 몸이 좋지 않은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조용히 왔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산아의 화장은 시신이 너무 작아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사산아의 유해는 다른 분골과 한데 모아지는 ‘산골’을 한다. 무연고자의 분골 등을 일정량 쌓아두었다가 땅에 묻는 식이다. 유해가 섞이는 산골이지만 유족들이 거부감을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자신보다 먼저 떠난 아들의 유해를 봉안당에 안치했다가 계속 생각나서 안 되겠다며 아들의 유해를 ‘산골’했던 부모도 있었다.
인천가족공원 지하에 보관된 무연고자 나무상자(왼쪽)와 용인 평온의 숲 봉안당에 모셔진 유골함.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인천가족공원 한천희 단장은 “무연고 시신은 행정기관을 통해 이곳으로 온다. 유족을 찾아주려는 시도를 하지만 성공한 사례는 1% 남짓이다. 간혹 무연고 시신을 찾으러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직계가족인 경우는 거의 없고 먼 친척이 와서 찾아 간다”고 설명했다. 무연고자의 유해는 앞으로 10년간 아무도 찾아가지 않으면 ‘산골’을 거쳐 다른 무연고 사망자 유해와 함께 합동으로 매장된다.
장례기사는 이러한 고인의 마지막 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다. 유족과 대화가 없어도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긴 설명 없이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립승화원 장례기사 이원철 씨(32)는 “유족들이 슬프게 우는 것을 보면 고인이 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미련에 남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담담하게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족들을 보면 평소에 그래도 잘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인의 유골을 받아 든 후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가족도 있었는데 종교적 이유에서라고 짐작하곤 한다”라고 설명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매번 지켜보는 것이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어려운 숙제다. 서울추모공원 장례기사 조복수 씨는 천안함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렀다. 조 씨는 “대량 전사가자 발생했을 때 이들을 한 번에 안치할 안치실과 화장장이 없었다. 임시 안치실에 있던 고인들이 홍성과 세종시 등의 화장장으로 흩어졌다”며 “장병들의 유해를 유족들이 모셔가는데 분단의 현실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 새삼 다가오더라. 끝날 때쯤에는 관계자가 아닌 유족이 된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극도의 슬픔을 겪고 있을 유족들을 생각해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다. 용인 평온의 숲 장례기사 김진석 씨(37)는 “유족들이 화장하기 직전 유품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관을 해체한 적이 있다. 관에 유품을 넣으면 안 되는데 몰래 유품을 넣어두는 유족들이 있다. 모르고 화장하다가 관 안에 있던 휴대폰이 폭발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매장용 장례용품과 화장용 장례용품 구분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것도 김 씨에겐 과제다. 매장용 관일수록 두껍고 비싼 편인데 고인을 위해 더 좋은 것을 해주려다가 오히려 화장시간이 오래 걸려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화장 시간은 1시간 30분인데 두꺼운 관은 3시간까지 걸리기도 해 곤란을 겪은 적도 있다. 김 씨는 “중환자실, 장례식장 등 12년째 이쪽에 종사하다보니 죽음이란 것에 대한 공포가 조금은 없어졌다.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느끼는 점은 결국 하나다”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한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강기준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