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안듣는다며 배우(김희갑)를 폭행하여 갈비뼈를 부러뜨린 무식한 영화제작자, 대학생(4·18 고대 학생데모 참가자)을 깡패들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한 잔인한 폭력배의 모습이 그것.
특히 최근 안방극장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 TV <야인시대>에서 탤런트 최준용씨가 분한 임화수는 단순 무식에 툭하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인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영화계 인사들과 유족측이 “고인에 대한 지나친 왜곡을 이제 더 이상은 못참겠다”며 들고 일어났다.
▲ 1959년 홍콩 영화사의 초청으로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 왼 쪽부터 홍콩 영화사 관계자와 여배우, 임화수, 한국 최초 복싱 동양챔피언 강세철. | ||
이들은 “정치깡패 사형수의 자식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지내온 지난 40여 년의 불우한 시절보다는, 지금까지도 정확한 고증이나 확인도 없이 무조건 부친을 매도하고 있는 무책임한 방송의 작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들이 나서게 된 배경에는 원로 영화인들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연예협회 명예이사장 박호씨를 비롯, 영화감독 신상옥, 영화배우 윤일봉, 희극인 구봉서, 전 극동영화사 사장 문금순씨 등 원로 영화인들이 최근 들어 일제히 “드라마 <야인시대>가 보여주는 임화수의 모습은 과장과 왜곡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미 돌아가신 고인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남아있는 유족들이 드라마를 보며 느끼게 될 참담한 심경을 생각해보면 이는 고인에 이어 유족들까지 죽이는 또다른 살인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일본에서 활발히 사업을 하고 있는 태균씨는 이들로부터 “이젠 자식들이 나서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부를 받았다. 태균씨는 “불우한 환경속에서도 잘 자라준 동생들이 고맙지만 이젠 아버지를 위해 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동생 태영씨는 국내 유명 교육업체의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했고, 동미씨 역시 서울 강남에서 사업을 하며 기반을 다지고 있다.
유족들은 특히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씨에게 상당한 반감을 표하고 있다. 태균씨는 “지난 90년에도 당시 KBS 2TV <무풍지대>를 통해 이 작가가 부친에 대해 폭력과 폭언만 일삼는 무식한 깡패로 묘사한 바 있었다. 그때에도 사실 관계를 정확히 헤아려서 그려달라고 당부를 했는데 묵살됐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분개했다.
태균씨 등은 현재 SBS와 작가 이씨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 그리고 방송을 통해서 정정문 게재는 물론 이씨의 집필을 중지해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SBS측은 변호인을 통해 “극중 임화수의 캐릭터는 객관적인 정황으로 판단되는 숱한 증언과 자료, 저술서 등을 참고로 표현된 것”이라며 “결코 작가의 상상이나 의도적 왜곡은 있을 수도, 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이씨가 참고로 했다는 책은 유지광의 <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지광은 당시 임화수와 함께 고대생 습격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된 후 풀려났다.
태균씨는 “유지광 아저씨는 우리 부친과 더불어 당시 같은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부친만 사형이 집행되고 그 아저씨는 감형이 되어 결국 석방되어 풀려나왔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작가 이씨의 주장처럼 오늘날 유지광의 <대명>은 50∼60년대 당시의 주먹세계를 묘사하는 표준서처럼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철저히 유지광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지광의 입을 빌려 직접 집필을 담당한 손석주 전 중앙일보 기자(65)도 스스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손씨는 “당시 역사적 상황의 가장 생생한 생존 증언자로 유지광만한 인물이 없었다. 또한 그 소설은 유지광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야인시대>에 대해서는 매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자신이 쓴 내용과 지금의 드라마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 그는 “늦은 나이지만 지금 다시 펜을 들기 시작했다. 임화수를 비롯 당시 인물들을 중심으로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파헤쳐서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책을 꼭 남기겠다. 그것이 마지막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생존해 있는 당시의 증언자들을 취재하는 데 마지막 열정을 바치고 있다.
임화수는 1924년생으로 가난한 환경탓에 초등학교 중퇴라는 학력으로 날품팔이에 나서야 했다. 당시 그는 종로4가에 위치한 평화극장에서 판매원을 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이후 극장을 지키는 이른바 ‘기도’로 성장하면서 큰 주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이기붕 이정재 등의 후광을 업고 권력형 주먹으로 성장가도를 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정치깡패의 대표적 인물로 사형을 당해야 할 만큼의 극악한 범죄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특히 61년 12월 당시 자행된 임화수를 비롯, 조용수 전 <민족일보> 사장 등 8명의 전격적인 사형 집행에 대해 지금도 많은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군사정 권의 공포정치를 위한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