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도 ‘꿈’만 먹고 살 순 없었다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죽음의 원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알려졌다. 박 대표의 영결식 모습과 페이스북 사진 캡처(작은 사진). 사진제공=노동당
“미안합니다. 제가 큰딸 박은지 동지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지난 9일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로비에서 영면에 든 박은지 부대표를 추모하면서 그녀의 아버지 박덕경 씨가 한 말이다. 유족대표이자 박 부대표의 아버지인 박덕경 씨는 장애인으로서 장애인 인권을 위해 싸웠던 전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장이었다. 밝고 명랑했던 박 부대표는 장애인 인권 운동가인 아버지 박덕경 씨에게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데 힘이 되는 딸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박 부대표의 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20대 중반,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박 부대표는 서울 국사봉중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게 됐다. 계약기간은 1년. 출산휴가 3개월 기간제 자리부터 휴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경기도 어느 공고까지 89통에 이르는 이력서를 쓰고서야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학생운동을 하느라 ‘스펙’을 쌓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한 박 부대표에게는 계약직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박 부대표는 어렵게 얻은 기간제 교사 계약기간 1년 중 6개월도 채 채우지 못했다. 임신 소식을 알리자마자 학교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종료를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있었지만 박 부대표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교조의 일원이 되어 참교육을 실천하고 싶었던 박 부대표는 교사의 꿈을 접고 그렇게 학교를 나와야 했다.
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해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박 부대표는 학원 강사를 했다. 학원 강사 수입은 기간제 교사보다는 괜찮았지만 아이의 베이비시터 급여까지 챙겨주기에는 빠듯했다.
그런 박 부대표가 진보정당에 희망을 걸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 부대표는 18대 총선 동작을 김종철 후보 수행비서직을 수행하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진보운동가의 삶을 향해 다시 한 번 발을 내딛었다.
박 부대표는 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 언론국장으로 일을 시작해 최연소 대변인이 되면서 입지를 넓혀갔다. 박 부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청소노동자 김순자 씨와 지식인 홍세화 씨 등과 함께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노동당(전 진보신당)의 부대표로 당선돼 대변인을 겸직했다.
사진제공=노동당
97억 2900만 원으로 책정된 올해 1분기 국고보조금은 새누리당이 44억 4340만 원(45.7%), 민주당 40억 6662만 원(41.8%), 통합진보당 6억 9979만 원(7.2%), 정의당 5억 1980만 원(5.3%)순으로 가져갔다. 진보정당 당직자들의 경우 월급만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실제로 원내 진보정당의 당직자 A 씨는 “천진하게 말해서 정말 소신을 위해 ‘버티는’ 당직자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사교육 교사로 뛰어드는 당직자들이 많다. 자신들이 거부했던 ‘입시교육’이라는 틀로 들어가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노동당의 경우 올해 1분기 국고보조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현재 노동당은 100% 당비로 운영금을 충당하고 있다. 당직자에게는 최저임금밖에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5210원을 하루 8시간 기준으로(주말제외) 계산해도 한 달 1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급여다.
윤현식 노동당 대변인은 “당직이라는 것이 당 활동 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부수입 확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당직자 중에는 자녀교육이나 건강 문제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눈물을 머금고 당을 떠나는 당직자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 부대표는 지난 2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며 “한 해 동안 아이는 키가 9.4cm 컸고, 방과 후 학교 어딘가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방 한 번, 실내화 주머니를 두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고, 꿈을 기관사에서 딱지장사로 바꿨다…”는 글로 아들과 지내는 소소한 일상을 전하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 계약직 기간제 교사로 싱글맘으로 군소정당 당직자로 세상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온 박 부대표의 ‘본인상’이라는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9세가 된 아들의 신고로 경찰과 소방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박 부대표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기자들과 잘 이겨내지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도 원외 정당이었던 노동당을 알리려고 했다는 박 부대표의 바람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검색어 상위에 오르는 씁쓸함을 남겼다.
박 부대표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노동당 당직자들을 비롯해 사회단체 활동가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노동당의 이용길 대표는 “진보정당에 자신의 젊음을 불사르기로 결심했을 때, 진보정당은 길을 잃고 헤매는 형편이었다”며 “고인의 밝던 눈빛과 명랑한 웃음소리 그 힘으로 버텨 내겠다”며 고인이 된 박 부대표를 떠나보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