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파일 들고 미·일행…국정원은 ‘깜깜’
북한 암호 권위자와 김일성 인척의 망명 시도를 보도한 MBC(위)와 장성택 사형을 보도한 YTN 뉴스 화면 캡처.
1주일쯤 뒤 MBC에서 좀 더 구체적인 보도가 나왔다. 지난 3월 18일 북한의 암호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권위자인 박 아무개 박사가 망명의사를 밝히고 미국·일본 정보당국과 교섭 중이라는 것이었다. 박 박사는 북한의 해커 양성소로 알려진 414연락소의 중국내 위장회사에서 일해왔는데, 장성택과의 친분 관계로 인해 숙청될 위기에 처하자 망명을 결심했다고 한다.
노동당 밑에 있다 지금은 국방위 정찰총국 관리 하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414연락소는 김책공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IT 영재들을 데려다 해커로 훈련시켜 중국 등지로 보내 해커 작전을 펼치는 곳이다. 박 박사는 우리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와 노동당의 2012년 정보암호화 프로그램과 최근 발행된 북한 군용지도 등 여러 극비 파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위인사에다 바로 신뢰할 수 있는 극비자료를 가지고 있다면 그 정보자산가치는 매우 높다.
특히 북한은 지난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발표 직전 김정은 대장의 명령 1호 하달 사실이 우리 군 대북 감청망에 포착되자, 교신 주파수와 암호체계를 모두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박사가 들고 나온 암호자료가 그 이후 생성된 것이라면 정보가치는 천정부지로 뛸 수 있다는 분석이다.
흥미로운 것은 박 박사와 함께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일행이다. 김일성의 인척, 즉 친가의 사위가 포함돼 있다는 것. MBC는 이 인물을 박 박사의 친구인 김 아무개 씨로 지칭했다. 박 박사와 김 씨는 2000년 초반 이전에 지병으로 북한의 고위층만 치료받는 봉화진료소에서 함께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친분을 쌓은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 일가의 인척은 이른바 적통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은 아니더라도 정치적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부유한 삶을 보장받는다. 그러한 김 씨가 망명을 했다는 것은 일가에 위해가 되는 일을 그가 벌였다는 것인데, 현재로선 처형된 장성택과의 깊은 친분 때문에 숙청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장성택 계열에 대한 숙청은 매우 선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필요에 따라 정교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장성택 측근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의 경제개발구 창설과 운영을 전담하는 국가경제개발위원회의 김기석 위원장과 김철진 제1부위원장은 최근 복귀했다. 장성택의 조카사위로 알려진 국장급 홍 아무개 씨가 숙청된 정도가 다다. 따라서 이번 망명한 박 박사 일행은 장성택과 매우 깊은 관계였을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의 중요인물들을 탈북시키는 데 관여해온 대북 관계자는 “장성택 처형 이후 같이 숙청되거나 불이익을 받을 만한 장성택 계열 인물들이 중국에 있다 본국으로 들어가지 않고, 망명을 하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중 정보가치가 있는 자들은 극소수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일본과 미국행을 택했을까. 우선 이들이 국정원의 망에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처음 주중 한국 대사관 측을 접촉했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즉각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미국과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박 박사 일행 측은 자신의 부탁을 받은 중국 현지 북한무역회사 직원이 대사관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 직원은 ‘장성택 측근 2명을 보호 중인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대사관 측에서는 ‘대사관 밖에서는 도움을 줄 수 없고 대사관에 들어오면 도움을 주겠다’는 답을 줬고, 다급한 나머지 다른 루트를 통해 일본과 미국 정보당국을 접촉했다는 것이다. 대사관 전화도 도청이 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대사관 정문도 24시간 감시대상이어서 ‘들어오면 도와주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큰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정부가 탈북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대사관은 이른바 ‘조용한 외교’ 기조를 지킬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이를 두고 ‘알아서 들어오라는 거냐’며 항의하는 경우가 잦다.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대사관의 경우 대사관으로 도움요청이 들어오면 교민으로 가장한 정보관계자를 보내 대사관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대사관은 상대적으로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아 신중한 입장이다. 우리 외교부는 이번 망명과 관련해 ‘그런 사실을 보고받은 적 없다’고 밝혔고, 국정원도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 정도의 인물이 베이징에 나와 있다면 망명 여부와 관계없이 신원이나 이름, 역할 정도는 국정원이 파악하는 게 정설이다. 특히 이들이 한국행이나 미국행을 원했다는 점에서 베이징의 국정원 망루에 구멍이 생겼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우리 측 정보당국 관계자는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우성 간첩혐의 사건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2주 전부터 유우성 사건과 관련돼 베이징에 있던 블랙요원들이 국내로 송환됐다. 블랙요원이 중국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판을 통해 공개되면서 중국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 중국정부도 각국 정보요원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나온 이상 어느 나라가 용인하겠나. 베이징 대북 정보활동이 마비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이번 망명건을 확인해주지는 않았지만, 베이징의 국정원 블랙요원들의 활동이 최근 상당히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박 박사가 가지고 있는 암호파일의 파괴력은 아직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북소식통은 그러나 “일본과 미국 정보당국이 박 박사의 이름만 듣고 곧바로 망명 교섭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일단 정보자산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며 “앞으로 우리 정부의 대북 정보 수집에 큰 손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김지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