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발가벗겨 물고문 저항하면 무차별 폭행도
1987년 당시 구제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형제복지원을 ‘생지옥’으로 표현했다. 의식주 등 기본적인 생활조건은 갖춰지지 않았고 언어적, 신체적, 성적 폭력은 일상이었다. 당시 형제복지원 내부 생활은 군대식이었다. 수용 인원에 따라 20~30소대 정도가 있었다. 한 소대에 80~100명이 배정됐다.
형제복지원 한 수용자의 앙상한 뼈만 남은 모습. 사진출처=인터넷 커뮤니티
복지원은 철조망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두 개의 망루를 둬 수용자들을 감시했다. 또한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두고 24시간 복지원 주변을 지키게 했다. 문제를 일으킨 수용자들을 감금하는 격리실을 20여 개 운영하기도 했다. 원장실 옆에는 고문실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수용자들은 1인용 철제침대에서 3 명이 잠을 잤다. 결핵에 걸린 수용자 20여 명을 한 방에 수용하기도 했다. 침대가 부족할 땐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자는 경우도 있었다. 1987년 당시 보도에 따르면 수용시설이 모자랄 땐 축사에서도 생활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잠을 잘 땐 외부에서 문을 잠갔다. 지급된 옷은 파란트레이닝복, 검은 고무신, 속옷 한 벌이 전부였다. 사계절을 같은 옷으로 버텼다. 식사 역시 형편없었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보리밥에 된장을 조금 푼 소금국, 모래가 씹히는 김치가 매끼 나오는 식단이었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됐다. 수용자들은 기상 직후부터 10시간 이상 노역을 했다. 한 수용자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과를 생생히 증언했다.
“바위를 들고 150m 정도의 산길을 뛰어올랐다. 산 위에선 해머와 정으로 바위를 부숴 자갈로 만드는 일을 했다. 하루에 1인당 6가마니를 만들어야 했다. 만들어진 자갈은 원장의 개인 목장이나 건물을 만드는 데 쓰였다. 쉬는 시간은 오전과 오후 각 10분씩이었다.”
노역 중 매질도 매일 이어졌다. 작업량을 채우지 못해도, 걸어 다니며 일을 해도 작업반장 혹은 경비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수용자들에게 주어진 건 원내노역뿐이 아니었다. 부산 주변 산간지역의 대형 고압선 철탑 건설공사, 대형빌딩 신축공사 등 위험한 작업장에 수용자들을 파견보내기도 했다. 당시 외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조사된 1500여 명 중 임금을 받은 사람은 150명에 그친다.
수용자들은 일상생활 중에도 매일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불을 제대로 접지 못해도, 배식 중 식판을 제대로 들지 않아도 가혹행위를 당했다. 생존자들은 “원산폭격 자세는 가장 쉬운 기합이었다. 나중에는 그 자세로 잠을 자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박인근 원장의 개인목장이나 운전교습소를 운영하는 데도 수용자들이 동원됐다. 노역을 거부하는 수용자를 경비원들이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복지원에서는 당시 허위진단서를 꾸며 숨진 김 아무개 씨를 병사로 꾸며 가매장하기도 했다.
생존자 한종선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성추행당하고, 동성 성폭행을 당했다. 잘못 맞아 머리가 터져 죽는 아이도 있었다. 무엇을 잘못한지도 모른 채 ‘한 번 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곳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한 씨는 “열한 살쯤 한겨울 외부 세면장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명치를 수십 대 맞고 손발을 묶인 상태에서 얼굴에 찬물을 끊임없이 뿌리는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서윤심 인턴기자 heart50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