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인사를 둘러싼 강금실 장관(왼쪽)과 송광수 검찰총장(오른쪽)의 ‘전쟁’은 결국 송 총장의 승리로 귀결됐다. | ||
일단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번 싸움의 승자는 송 총장이다. 당초 2월1일자로 단행될 예정이던 정기 인사를 4월 총선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지난 20일 이춘성 법무부 공보관을 통해 “이번 검찰인사는 전면적인 자리 이동보다는 재경지청의 승격에 따른 최소한의 검사장급 인사를 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검 요구대로 검찰 고위간부들에 대한 대규모 승진 및 전보인사를 미루기로 한 것이다.
도대체 강 장관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어떤 곡절이 있었던 것일까.
강 장관은 이미 지난해 9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내년 봄에 깜짝 놀랄 만한 인사를 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또 지난 13일에는 이례적으로 보도 자료를 통해 2월1일자로 인사를 할 계획임을 공표하는 등 인사 단행 의지를 공공연히 밝혀왔다.
이에 반해 대검측은 그동안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인사 연기를 주장해왔다.
우선 이번에 인사를 단행할 경우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문에 전원 유임 결정이 내려진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상대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게 되고, 이는 수사팀의 사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대검은 “총선을 앞두고 검찰 조직을 흔드는 인사를 한 전례가 없다”는 주장도 폈다.
대검은 지난 16일 정기 인사문제를 논의할 1차 검찰인사위원회 개최에 앞서 이런 의견을 법무부에 직·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대검은 이 과정에서 청와대에도 인사 연기를 적극적으로 요청했으며, 청와대는 이를 수용해 강금실 법무장관에게 ‘연기 검토’를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측은 일단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외교부 징계 파문에 이어 검찰 조직이 인사 회오리에 휘말려 불필요한 잡음을 낼 경우 야당에 정치공세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대검 의견을 받아들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법무부측은 “이미 예고된 인사인데 늦출 수 없다”며 인사를 강행할 뜻을 청와대와 대검에 피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의 반박 논리는 ▲몇 사람에 불과한 대검 중수부 팀원들의 사기 저하를 이유로 중차대한 정기 인사를 미루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참여정부 출범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중립성이 강화된 검찰 조직이 총선을 이유로 인사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대검측 주장은 대외 명분용이고, 실제로는 강금실 장관의 인사권 행사를 최대한 저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검찰의 한 중간 간부도 “솔직히 말해서 대검은 지금 ‘강 장관이 하는 인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 지난해 9월 ‘보신탕집 회동’으로 갈등을 봉합했던 송 총장과 강 장관. | ||
실제로 강 장관은 이번에 전국 1천4백 명의 검사 중 7백∼8백 명이 자리를 옮기는 통상 정기인사 때보다 많은 1천 명선의 대규모 인사를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검찰청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검사장 등의 직급이 폐지되고, 5개 재경지청이 지검으로 승격되는 것에 발맞춰 기존 검사장급 이상 고위 간부들 중 ‘개혁 코드’에 맞지 않는 일부 인사들은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반대로 개혁적이고 참신한 검사들을 검사장급 보직에 전격 발탁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대검은 본인의 부인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열린우리당에 의한 ‘총선 차출설’이 나돌고 있는 강 장관의 총선 출마 가능성도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설령 강 장관이 출마하지 않더라도 정국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중도 하차할 개연성이 있는 만큼 최대한 인사 시기를 늦추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을 했을 법하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송 총장이 이처럼 이번 인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실상 재임 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정기 인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년 4월2일로 2년의 임기가 끝나는 송 총장으로서는 힘이 다 빠진 임기 말에 맞는 내년 2월 정기 인사에서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이번이 자기 사람들을 밀어줄 마지막 기회라고 보고, 총장의 인사협의권을 무시해온 강 장관식 인사를 저지하려 한다는 해석이다.
어쨌든 이처럼 법무부와 대검의 양측 의견이 팽팽히 맞섬에 따라 16일 법무부에서 열린 검찰인사위원회(위원장 김수장 변호사)는 인사 규모 등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산회했다.
이어 19일 다시 소집된 인사위원회에서도 난상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9명의 위원들은 김종빈 대검 차장 등 검찰측의 거듭된 ‘인사 연기’ 주장을 사실상 수용해 2월 검사장 인사는 최소폭으로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강효리’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국민적 스타’가 된 강 장관과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역시 국민들의 큰 성원을 받고 있는 송 총장 사이의 ‘포성없는 전쟁’이 송 총장의 승리로 귀결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사태로 평소 ‘검찰은 수사로, 장관은 인사로 말한다’는 원칙을 강조해온 강 장관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됐다. 당장 조직 장악력이 예전같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 장관직을 물러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레임덕 현상’을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 때문에 강 장관이 그토록 고사해온 총선 출마 쪽으로 방향을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성급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강 장관이 인사위원회 개최 다음날인 지난 20일 국무회의 참석차 청와대에 갔다가 맞닥뜨린 기자들로부터 총선 출마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이고, 내 팔자야. 그냥 ‘에이씨’하고 해버릴까요”라고 자조적으로 말한 것도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거꾸로 강 장관이 더욱 마음을 다 잡고 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검찰 개혁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지난해 밝힌 구상대로 검찰 조직에 대한 법무부의 감찰 등 ‘문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등이 추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원래 마음먹은 대로 총선에 나가지 않을 경우 총선 직후인 5월경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법무부와 검찰 일각에서는 이번에 청와대가 대검의 ‘인사 연기’ 주장에 힘을 실어준 배경을 놓고 “작금의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성이 있다”는 ‘설’이 나돌아 진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급속히 퍼지고 있는 이 ‘설’은 “대검 중수부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측이 대검의 ‘인사 연기’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수세에 몰려 있는 청와대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대검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굴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청와대는 알려진 것과 달리 법무부에 단순히 ‘대검의 건의를 검토해보라’고 당부한 것이 아니라 종용 수준의 압박을 가했을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도 돌고 있다.
한 검찰 인사는 “일각에서 ‘대검이 수사권을 무기로 강 장관의 인사권을 무력화했다’며 대선자금 수사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검찰 주변에서는 “아무래도 검찰 수사로 위축돼 있는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대검 의사를 법무부에 전달했을 수는 있겠으나, 요즘 분위기로 봐서 대검이 수사를 빌미로 ‘압력성 부탁’을 했을 리 만무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검찰 관계자는 “어떤 세상인데 법무부가 ‘인사 연기’ 건의를 수용했다고 대검이 노 후보 캠프에 대한 수사를 가볍게 할 수 있겠느냐”며 “법무부와 대검간 갈등이 커지다 보니 이런 저런 억측들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