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지청의 기획검사인 이 검사는 한창 다른 사건의 조사로 눈코 뜰 새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엘비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영어가 서툴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척 절박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이 검사는 이 낯선 이방인 여성의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 검사와 엘비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엘비라의 사연은 딱했다.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는 러시아의 한 공연단에서 활동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지난 5월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한국에서의 생활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풍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했지만 급여를 받지 못했다.
때문에 돈을 모으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해나갈 수 없었다. 업주에게 여러 차례 부탁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업주는 물이 가득 담긴 생수병을 던지는 등 폭행까지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그는 레스토랑을 뛰쳐나와 한동안 탄현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얹혀 지냈다. 하지만 친구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보니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끼니를 굶기도 여러 번, 거리를 방황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비자 만료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가진 돈이라고는 고작 8천원뿐이었다. 결국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이 검사의 사무실이었다.
이 검사는 “임금체불의 경우 노동사무소를 통해 절차를 밟아야 할 사안이니 그곳에 진정서를 제출하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엘비라는 더욱 간절하게 매달렸다. 자신은 노동사무소가 있는 의정부까지 갈 차비조차 없고, 한국인 친구가 없다고 호소했다.
엘비라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이 검사는 “그가 비자만료일까지 출국하지 못하고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한다면 평생 한국을 원망하고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그는 “지금 당장 이 여성을 돕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팔을 걷어붙이며 직접 해결에 나섰다.
이 검사는 즉시 문제의 레스토랑 업주를 소환해 임금체불과 폭행 사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엘비라를 불러 대질신문까지 하자 당황한 업주는 그 자리에서 한달치 급여 7백달러와 치료비 1천달러, 그리고 러시아행 항공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엘비라는 이 검사가 보는 앞에서 업주로부터 합의금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이 검사는 엘비라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용기를 북돋워 주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출국 수속을 도왔다. 그녀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업주는 폭력 혐의로 입건시켰다.
이 검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엘비라 역시 이 검사의 온정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그녀는 고양경찰서에서 합의진술서를 쓰면서도 “급한 사정을 도와줘 문제없이 출국할 수 있도록 해준 이 검사님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또 “업주도 선처를 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같은 이 검사와 엘비라와의 훈훈한 사연이 알려지자 고양지청에는 격려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이 검사는 “다른 검사였더라도 눈물로 절박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외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만약 엘비라가 불법체류자로 잡히거나 돈 한푼 못받고 고국으로 쫓겨났다면 평생 한국이라는 나라를 원망했을 것”이라며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한 국내 업주들도 이런 점을 잘 인식하고 임금만큼은 우선적으로 해결해 줘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 김해성 목사는 “한 공무원의 정성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큰 희망을 주고, 또 한국을 사랑하게끔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라며 “그런 면에서 이 검사는 가장 효과적인 민간외교를 한 셈”이라고 밝혔다.
이 검사는 사시 33기 출신으로 대구지검 부산지검 등을 거쳐 지난 2월부터 서울지검 고양지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안성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