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KAL기 폭파가 조작된 사건이라고 믿고 있는 실종자 가족측은 그 의심의 첫 단추로 김현희를 가공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최근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그 조작 공방은 한층 더 가열되는 양상이다.
진실의 열쇠는 김현희 본인이 쥐고 있으나 그녀는 현재 꼭꼭 숨어 있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87년 당시 김현희를 바레인 현지에서 직접 이송해왔고, 이후 약 5년간 안가에서 함께 생활했던 안기부 여수사관 최아무개씨를 만나 진실을 추적했다.
5년 전 안기부를 퇴직하고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최씨는 “전직 안기부 직원으로서 당시의 일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며 인터뷰를 부담스러워했으나 “최근 김현희가 가공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이 갈수록 불거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바레인 현지에서 처음 만난 25세의 김현희는 완전 자포자기의 초췌함 가운데서도 전통적 미인형의 총기가 어려있는 강한 첫인상을 받았다. 내 또래였기에 최대한 언니처럼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주고자 애썼다. 생리일까지 챙겨주는 등 여자끼리만 느낄 수 있는 교감 같은 것 말이다. 북한에서 받은 교육탓인듯 한국의 ‘남산’ 요원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던 그녀도 차츰 일관된 우리들의 친절에 의외로 빨리 체념하는 듯했다.”
김현희의 가공 인물 가능성을 믿고 있는 쪽에서는 그녀의 열살 때 사진이 가짜라는 점을 그 유력한 증거로 꼽고 있다.
당시 안기부에서 제시한 72년 11월2일 평양공항에서의 한국대표단 접대 화동 사진 가운데 두 번째 소녀가 어린 시절의 김현희라고 발표한 것. 하지만 실종자 가족측에서는 “귀 모양 등 김현희가 절대 아니다”라고 의혹을 제기했고 전문가들도 여기에 동의했다.
이에 대해 최씨는 “김현희는 어린 시절부터 소위 잘나가는 소녀였다. 그런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랑삼아 한 얘기만 믿고 미처 면밀히 확인해보지 못한 수사상의 실수였다”고 밝혔다.
그는 “김현희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무렵 우리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면서 짐짓 자랑삼아 ‘열살 무렵 당시 남북조절위원회 남한 대표 방문 때 내가 대표로 뽑혀서 당시 남한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꽃을 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알아보니 당시 남한 최고위 인사는 장기용 대표였고 그에게 꽃을 전한 소녀가 자료 사진에 나와 있는 두 번째 소녀였기에 우린 당연히 그 애가 김현희가 맞겠거니 하고 발표한 거였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한 주간지 신년호에서 김현희의 어린 시절을 밝힐 만한 또 다른 사진을 공개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사진에는 당시 두 번째 소녀 뒤에 세 번째 소녀가 등장하는데, 일본의 한 교수는 “귓불과 입술 모양 등을 봤을 때 틀림없는 김현희”라고 밝히고 있는 것.
하지만 곧바로 뒤이어 사진의 합성 가능성이 또다시 불거지면서 조작 공방은 그치질 않고 있다. 김현희가 국내에 이송된 날짜가 공교롭게도 대선 바로 전날인 점도 의심을 받고 있는 대목.
최씨는 “사건 후 현지의 바레인 경찰이 수사를 하던 상황에서 우리와 일본이 서로 자국으로 인도하겠다는 신경전을 벌였다. 우리는 ‘KAL기가 폭파됐으니 당연히 한국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일본은 ‘마유미가 일본인이라고 하니 우리가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의 끈질긴 설득으로 중립적이던 바레인은 한국으로의 이송을 결정했다. 그것이 사건 발생 후 거의 열흘 만이었다. 우리는 12월13일 현지에 도착해서 바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당시 바레인 국왕 생일이고 공휴일이라는 이유로 하루 더 머물고 15일에야 데려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KAL기의 잔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들에 대해 최씨는 “1백 가지 발표한 수사 결과 중에서 10가지 정도가 의심쩍다고 해서 전체를 조작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일부에서는 김현희의 자백만 믿고 어떻게 단정짓느냐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김현희는 유일한 증언자였으며, 극형을 감수하고 본인 스스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데 어떻게 안 믿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나마 KAL기 폭파의 유일한 증인이 현재 김현희뿐인데 만약 그녀를 사형시키면 그 증거마저 없어지는 셈이다. 그러면 북한은 틀림없이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섰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현희는 90년 사형선고와 특별사면 등을 거치면서 <나도 이젠 여자가 되고 싶어요>,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린다>며 국민의 감성에 호소했고, 97년 12월에는 조사요원이었던 안기부 직원과 전격 결혼하면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최씨는 “신랑이 된 정아무개씨는 전형적인 경주 출신의 보수적인 점잖은 양반이었다. 안가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많았지만 두 사람이 언제부터 서로 좋아지게 됐는지 우리들도 전혀 몰랐다”며 웃었다.
결혼 이후로는 지금껏 전혀 연락도 없다는 것이 최씨의 설명. “김현희는 아마도 제발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람들 뇌리 속에서 빨리 잊혀지길 바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우리들과 한가족처럼 지냈지만 연락을 일부러 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