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실미도>가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실미도부대의 교관이었던 김방일씨가 영화와 다른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영화 <실미도>는 지난 12월24일 개봉한 이후 19일 만에 전국 5백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머지 않아 영화 <친구>가 세운 관객 최다 동원 기록도 훌쩍 넘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만큼 작품의 구성과 전개, 배우의 연기, 제작 기술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의미다.
<실미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계속 고조되면서 과연 이 영화가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사실·객관화시켜 반영했는지에 관한 궁금증도 커져가고 있다. <실미도>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그러나 제작 단계부터 당시 상황을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던 만큼 영화의 실제성 여부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영화 골수팬들이 적잖다.
<일요신문>은 이 영화와 당시 상황을 비교·분석하기 위해 실미도 부대 제3소대장으로 근무하며 3년간 훈련병들과 동고동락했던 김방일씨(60)를 단독으로 만났다. 영화에서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가슴속으로 훈련병들을 아꼈던 조 중사(허준호 분)의 모델인 김씨의 추억과 영화 <실미도>는 어떻게 다를까. 김씨는 영화와 실제 실미도 사건에는 14가지의 차이점이 있다고 증언했다.
- 1.모두 사형수는 아니었다
중앙정보부는 공군 첩보부대(OSI) 산하에 실미도 부대(정식명칭 공군 제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를 편성하고,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으로 부임한 최재현 준위(안성기 분)는 살인 미수범인 강인찬(설경구 분) 등 사형수를 포함한 재소자 31명을 모은다.
이 부분에 대해 김방일씨는 “부대원 31명 모두가 사형수는 아니었다. 30∼40% 정도가 강도나 깡패 전과가 있었다. 나머지는 복싱하다 온 친구도 있었고, 서울역 앞에서 구두 닦다 온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말했다.
- 2.기관총 난사는 섬에서
인천에서 실미도로 향하는 배안에서는 대원들간의 말싸움이 벌어지고 주먹다짐까지 오간다. 배 상부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 중사(허준호 분)는 기관총을 난사하고 겁에 질린 부대원들은 바다로 뛰어든다.
김방일씨는 “배에 태워서 온 것은 맞지만 대원들을 지하 선실에다 가둬놓고 데려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게 해선 안됐기 때문이었다. 배 바닥에 총을 난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미도에 오자마자 총을 땅에다 쐈다. 이후 훈련할 때도 계속 대원들의 발 밑으로 기관총을 쏘아댔다. 항상 긴장하면서 훈련에 열중하라는 의도였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또 “교관들은 실제 계급보다 높은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원래 최 준위의 모델인 김아무개 상사는 실제 대위 계급장을 달았었고, 조 중사와 박 중사도 중위 계급장을 달고 근무했다. 영화에서는 교관들이 준위, 중사 계급장을 달았다”고 밝혔다.
- 3.조별로 따로 내무반생활
새벽 31명의 대원들이 한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강인찬(설경구 분, 제3조장)과 한상필(정재영 분, 제1조장)이 말다툼을 하자 최연장자인 근재(강신일 분, 제2조장)는 둘이 싸우되 진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 부분에 대해 김방일씨는 “부대원들은 세 곳의 막사에 나누어 조별로 생활했다. 교육 대장과 기간병들의 막사는 따로 있었고, 제1조 소대장이었던 안아무개 중사(영화속 박 중사, 이정헌 분), 제2조 소대장 김아무개 중사, 제3조 소대장이었던 나(영화속 조 중사, 허준호 분)는 각 내무반에서 소속 부대원과 함께 취침했다”라고 증언했다.
김씨는 또 “교육대장실, 각 내부반에 걸려 있는 해골은 진짜 유골이다. 실미도에 와서 현지에 있던 관을 모조리 파헤쳐서 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먹었다. 부대원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해골은 다 진짜 유골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며 몸을 움찔했다.
▲ 당시 실미도부대의 기간병들 사진. 왼쪽 위로 실제 해골을 걸어둔 부대 마크가 보인다. | ||
영화 <실미도>에선 외줄다리 건너기 훈련을 하다 한 명이 부상당하고 한 명이 죽는 것으로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 김방일씨는 “외줄다리 건너기 훈련을 하다 사망한 사람은 없다. 두 대원이 외줄에서 떨어지기는 했는데 부상만 당했어. 두 대원은 나중에 음식 조리, 청소 등 부대 내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 두 친구가 나중에 4명 살아 남을 때 그 중에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또 “69년 4월 혹은 5월이었다. 대원들이 꽤 오래 참은 듯(?)해서 한 번 욕구를 풀어줄려고 인천으로 데리고 나가 H동 여인숙에 27명을 전부 방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여자를 방마다 보냈다. 서로 예쁜 여자 고를까봐 미리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1박을 시켰다. 그 다음날 고기와 해장국을 먹인 다음 부대로 복귀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모두 넋이 나가 있더라. 입에서 단내가 나더라고(웃음). 그날은 부대에서 쉬게 해 줬다”고 회상했다.
- 5.평양 진격은 수송기로
평양으로 진격하는 날. 새벽 부대원 전원은 개인화기로 무장한 채 3개조로 나누어 보트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부에서 작전 취소 명령이 떨어지고, 그 소식을 바다 한가운데서 접한 부대원들은 “제발 북으로 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친다.
이 부분에 대해 김씨는 “보트를 타고 가지는 않았다. 작전은 먼저 XX도에 가서 침투하기로 돼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보트를 타고 가나. 실제 수송기로 날아갔다. 원래는 열기구를 타고 가려 했다”고 말했다.
- 6.여교사 강간 대원은 셋
부대원 원희(임원희 분)와 또 다른 대원은 내무반에서 음란한 대화를 나누며 눈빛을 교환하다 인근 위도로 탈주한다. 그곳 분교에 들어간 이들은 때마침 학교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여교사를 번갈아가며 강간한다. 기간병들과 각조 조장 부대원은 이들을 뒤쫓는다. 이에 두 대원은 자살을 결심한다. 원희가 먼저 동료 대원을 칼로 찌르고 자신도 자살하려는 순간 강인찬 등 세 조장이 원희의 자살을 막는다. 부대로 복귀한 원희는 결국 강인찬의 손에 죽는다.
김씨는 “당시 갑자기 작전이 취소되고 긴장이 풀어지니까 자연히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강간을 저지른 부대원은 두 명이 아니고 세 명이었다. 이들은 자살을 시도해 두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나머지 한 명도 병원에 후송할 겨를도 없이 내무반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그 여선생님은 잘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김씨는 훈련 도중 사망한 대원은 총 7명이라고 말했다. 세 명이 강간사건으로 사망했으며, 독도법훈련을 하던 중 두 대원이 섬을 탈출하려다 동료 대원들에게 잡혀 ‘명’을 달리했고, 한 명은 수영훈련을 하다 익사했다고 한다. 기간병에게 항명했던 한 대원도 동료 대원들이 가만두지 않았다고. 후에 교관들은 이들을 화장시켜 바다에 뿌렸다고 한다.
- 7.조 중사 VS 박 중사
조 중사는 박 중사와 영화 중반 이후 사사건건 다투기 시작한다. 특히 부대원들의 북한 침투경로를 놓고 심한 마찰을 빚는다. 또 영화 후반부에는 부대를 없앨 것인지를 놓고 팽팽한 신경전까지 벌인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김씨는 “우리는 훈련을 담당했을 뿐이다. 하사관이 침투경로 등을 어떻게 알고 결정하겠나. 위에서 하는 것이지. 서로 논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 8.출장은 대장과 함께 갔다
부대원들을 전부 처리하기로 결심한 최 준위는 이를 반대하는 조 중사에게 상부를 설득해보라는 지시를 내리고 2박3일 출장을 명한다.
이에 대해 김씨는 “출장은 김 상사(영화속 최 준위)와 함께 떠났다. 8월21일 금요일에 나가 다음날 오후 인천에서 김 상사와 다시 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인근 가게 주인이 달려오더라. 약혼녀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친척이 왔으니 한 번 만나고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뭍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고’가 터졌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아내가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고 말했다.
▲ 당시 부대를 지휘하던 교관들. 위는 김방일씨(왼쪽)와 1소대장, 아래는 교육대장이다. | ||
영화 <실미도> 속 1968년 8월22일 심야. 내무반에 모여있던 부대원들은 교관 및 기간병을 먼저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작전에 돌입한다. 한편 그 시간 박 중사도 부대원들을 쓸어버리기로 하고 기간병 전원을 무장시킨다. 이윽고 총격전이 벌어진다.
이에 대해 김씨는 “부대원들의 습격은 아침 기상 시간에 이뤄졌다. 기간병들이 긴장을 풀고 세면을 하거나 잠에서 각 일어난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래서인지 기간병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고 회상했다.
- 10.부대해체사실 몰랐다
영화에서는 부대 해체 사실을 최 준위가 교관들에게 털어놓고 이를 목격한 강인찬이 동료들에게 부대 해체 사실을 전달한다. 그러나 김방일씨는 이를 부인했다. 부대에 관한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보급품의 질이 떨어지는 등 상부의 지원이 줄자 부대원들과 교관들이 부대 해체에 대한 느낌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 11.교육대장은 살해당했다
부대원들과 기간병들의 처절한 총격적인 벌어지는 가운데 강인찬은 교육대장인 최 준위 막사를 찾는다. 최 준위는 강인찬을 향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강인찬이 그대로 돌아서는 순간 최 준위는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이 부분에 대해 김씨는 “교육대장의 죽음은 자살은 아니다. 8월23일 일요일 아침 자고 있던 김아무개 상사(영화속 최 준위)는 당번 부대원이 장도리로 찍어 죽였다. 막사 벽 전체에 피가 튈 정도로 잔혹하게 죽였다. 당번 부대원은 그 자리에서 김 상사의 실탄 60발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을 전 부대원들이 나눠갖고 기간병을 습격했다. 부대원들은 탄약고부터 턴 게 아니다”고 말했다.
- 12.탈출 부대원은 23명
실제 1968년 8월23일 일요일 기간병들과 총격전을 벌인 대원은 24명. 그러나 해안가에서 한 명이 기간병의 총격을 받아 숨진다. 정확히 23명이 실미도를 탈출한 것이다. 장교 및 기간병은 총 25명 중 7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부식 보급 문제로 출장을 나갔던 김방일 소대장을 비롯, 6명이 ‘화’를 면했다. 김방일씨에 따르면 영화에서 30발 이상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박 중사(실제 김 중사)는 실제로도 수십 발의 총탄을 맞은 채 발견됐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기간병들은 변소나 매트리스, 그리고 뒷산 바위 등에 숨어 있었다.
- 13.자폭 생존자 있었다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군·경에 포위된 대원들은 버스 안에서 자폭한다.
김씨는 “전 대원이 버스 안에서 즉사한 것은 아니다. 23명 중 17명이 즉사했고, 6명이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 중 두 명은 부상이 심해 병원으로 후송하던 도중 숨졌다. 나머지 네 명도 그 후 군사재판을 받고 총살됐다”고 말했다.
- 14.조 중사 현장에 없었다
부대원들이 군·경과 대치하고 있는 노량진으로 달려온 조 중사의 손에서 부대원들에게 주려고 산 사탕과 과자가 떨어진다. 대원들을 설득하겠다는 그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폭발하고 조 중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에 대해 김씨는 “나는 일요일 오후 실미도로 복귀했다. 현장에는 가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 본대에 전화하니까 교신이 안 됐다. 그런데 뉴스에서 인천에 무장공비가 나타났다고 하니 순간 ‘우리 부대구나’하는 직감이 들었다. 실미도에 부랴부랴 들어가니 시체 투성이었다. 일주일 동안 타 부대의 병력 지원을 받아 시체를 내 손으로 치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수고하는 조장들을 위해 통닭 두 마리를 샀었다”며 “그것을 먹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돼 너무나 아쉬웠다”는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