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은 이미 서청원 떠났다’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최경환 원내대표(맨 왼쪽)가 발언을 하고 있는 가운데 서청원 의원(가운데)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얼마 전 국회에선 새누리당 사무총장 홍문종 의원과 관련된 정체불명의 괴문서가 돌았다. 홍 의원 비리 의혹에 대해 검찰이 내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홍 의원의 부적절한 사생활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와 증권가 정보지 등을 통해 루머가 급속도로 퍼지자 홍 의원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유명 인사나 연예인들이 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목숨까지 끊었는지 이해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홍 의원은 허위사실 유포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홍 의원은 친박 내에서도 ‘실세 중 실세’로 꼽힌다. 사무총장 겸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으며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홍 의원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퍼진 후 정치권에서 그 출처로 새누리당 비박계를 지목했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한 친박 의원은 “초반엔 비박 의원들을 이끌고 있는 중진급의 한 의원실 관계자가 문서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곧 기류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비주류가 아닌 친박 내에서 생산된 것이란 주장이 나온 것이다. 최경환 원내대표·홍문종 사무총장·윤상현 수석부대표, 이른바 ‘친박 핵심 3인방’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몇몇 친박 인사들의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얘기도 흘러나왔다.
지난해 10월 재·보궐 선거를 통해 컴백한 서 의원은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여권의 ‘큰 어른’으로 통한다. 친박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7선답게 여야, 계파를 가리지 않는 인맥을 자랑한다. 박 대통령이 당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 의원 공천을 밀어붙였던 것도 당의 구심점을 세우고 막혀 있는 대야 관계를 뚫어보기 위해서였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서 의원에게 공천을 줄 때 친박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지만 박 대통령 의지가 워낙 강해 (공천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선 국회에 입성한 서 의원의 향후 거취를 놓고 견해가 분분했다. 국회의장과 당 대표 중 어떤 자리에 도전할 것인지를 놓고 전망이 엇갈렸던 것이다. 서 의원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지만 전당대회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 의원은 올해 들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누리당 의원들과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 친이계 의원은 “서 의원이 의원들을 몇 명씩 짝지어 점심을 한다. 저녁엔 주로 기자들과 만나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회의장을 생각하고 있으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당권을 노리고 표 관리 차원에서 의원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 의원의 당권 행보는 그리 녹록해보이지만은 않는다. 당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 김무성 의원을 염두에 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 의원으로선 달아나려 하고 있는 ‘집토끼’의 사수가 시급한 과제라는 게 정치권의 우세한 관측이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지난해 서 의원이 국회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어떤 자리든 골라서 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서 의원이 전당대회에 출마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서 의원이 국회의장으로 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에서의 서 의원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친박 인사 상당수가 동의하는 부분이다. 친박계의 또 다른 의원은 “서 의원의 최근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재·보선 당선 후 서 의원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회의석상에서 센 발언도 많이 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뉴스에 나오지 않고 있다. 전면에 나서는 일도 좀처럼 없다. 부자 몸조심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것 같다. 아니면 본인이 판단해서 정중동 모드로 들어간 거든지”고 말했다. 서 의원이 두문불출하자 한때 여의도엔 ‘건강 악화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왼쪽부터 홍문종 사무총장, 윤상현 수석부대표.
이러한 기류는 충청권 중진 이완구 의원의 원내대표 내정설과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의원이 친박 핵심들 도움을 받아 원내 사령탑으로 선출되면 서 의원의 당권 도전은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같은 지역에서 나온 전례는 없다. 서 의원은 지역구는 수도권(경기 화성갑)이긴 하지만 출신지는 충남 천안이다.
이와 관련, 서 의원이 ‘이완구 대항마’로 울산 출신 4선 정갑윤 의원을 물밑에서 지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이 불쾌감을 내비쳤다는 얘기도 나온다. 서 의원 측 관계자는 “고향은 충남이지만 서울에서 20년 넘게 정치를 했고 지금 지역구는 경기도 화성”이라며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현재 친박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검토되고 있는 ‘서청원 활용법’ 중 가장 유력한 것은 국회의장 추대다. 원내 다수당 최다선이 맡는 관례에 따라 서 의원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직 현장 정치에 강한 뜻을 두고 있는 서 의원이 은퇴 수순으로 받아들여지는 국회의장 직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서 의원과 가까운 한 의원은 “서 의원은 전당대회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왜 자꾸 국회의장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당권을 내심 바라고 있는 최경환 원내대표 쪽에서 흘리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떠오른 대안이 바로 정무장관 부활이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지난 3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앞으로 남은 4년간 무엇보다 중요한 경제와 국민 통합을 위해 야당과의 소통을 이뤄내야 한다. 정부와의 가교 역할을 담당할 정무장관직을 부활하자”고 밝힌 바 있다. 그 직후 정무장관 후보 하마평이 오르내렸는데 서 의원 이름도 포함됐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당시 이를 두고 최 원내대표의 묘수라는 반응이 많았다. 야권과도 긴밀한 사이인 서 의원을 정무장관으로 보낸다고 하면 박 대통령 역시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그 후 최 원내대표가 직접 당권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그러나 어떤 시나리오이던 그동안 전당대회를 준비해오던 서 의원으로선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앞서의 서 의원 측 관계자는 “야당과 사이가 좋으니 정무장관으로 발탁을 해야 한다는 게 최 원내대표 쪽 생각인 것 같다”면서 “그러지 말고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최 원내대표가 당권 말고 경제부총리를 맡아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경제팀 교체설이 불거질 때마다 거론됐던 최 원내대표의 경제부총리 발탁을 재차 꺼내며 ‘맞불’을 놓은 것이다.
여권에선 박 대통령이 직접 ‘교통정리’에 나서서 친박 내부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의원들 역시 “둘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박 대통령뿐”이라며 결단을 촉구했다. 시간을 끌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져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지금까지의 양상을 종합해보면 박 대통령이 친박 신주류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박 대통령 역시 서 의원과 최 원내대표가 전당대회에 동반 출격할 경우 표 분산으로 인해 김무성 의원을 이기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집권 중반기를 맞은 박 대통령은 전당대회를 친박 재편 작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또 개각과도 연결 지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최선의 조합을 찾아낼 것”이라고 전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