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품에 안고 꿩 넘보다 둘 다 놓쳤다
영화 <권법>의 주연으로 발탁됐다가 계약파기 당한 배우 여진구.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제작사 측은 공식 보도 자료를 내고 “여진구 측이 먼저 잘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법>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다른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계약파기의 이유였다. <권법>을 준비할 충분한 여력이 없다는 제작사의 주장은 일견 수긍이 간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여진구 측에 먼저 계약파기를 통보한 후 김수현에게 러브콜을 보냈어야 옳다. 여진구를 ‘최후의 보루’로 잡아놓은 상태에서 김수현 측을 ‘간 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김수현의 소속사 측은 “CJ의 섭외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는 여진구의 소속사와 제작사의 맞대결 양상으로 그림이 달라졌다. CJ는 뒤로 쑥 빠진 모양새다.
이 모습을 보며 적잖은 영화인들은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CJ와 제작사가 상도의를 어기면서까지 김수현을 잡고 싶은 마음을 안다는 뜻이다.
영화는 드라마와 다르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관객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선택된다. 영화관까지 찾아가 티켓 값을 지불해야 하는 콘텐츠인 만큼 관객들은 ‘돈값’하는 영화를 찾으려 한다.
배우들의 ‘티켓 파워’가 중시되는 이유다. 김수현은 영화 <도둑들>과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통해 영화배우로도 검증됐다. 아직 성장 과정인 여진구에 비해 보다 명확한 흥행 카드다. 게다가 <별에서 온 그대> 이후 김수현은 중국 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중국 자본이 투입된 <권법>이 중국 내에서 대규모 개봉되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 측에서 김수현을 캐스팅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권법>은 220억 원이 투입되는 대작이다. 중국 내 흥행을 차치한다면 국내 극장가에서 최소 700만 명은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 제작사와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티켓 파워가 높은 배우를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양측의 기대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배우는 단연 김수현이다. 때문에 제작사와 투자배급사는 무리수를 뒀다. 그 결과 여진구에게는 상처를 줬고, 김수현은 놓쳤다.
사실 영화를 만들며 1순위로 손꼽은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는 드물다. 섭외하길 원하는 배우들과 두루 접촉한 후 관심을 보이는 배우를 우선순위로 둔다. 물론 각각에게 “섭외받은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문어발식으로 여러 배우들과 접촉 중이란 사실을 좋아할 배우는 없기 때문이다.
출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무작정 계약이 체결되는 것도 아니다. 양측이 원하는 개런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은 고정 출연료 외에 러닝 개런티를 요구하는 배우들이 많기 때문에 제작사의 고민이 더 커졌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아예 러닝 개런티 계약을 맺자고 하면 우리도 속 편하다. 흥행 여부에 따라 아주 적은 개런티만 지불하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정 출연료는 다 챙기고 가외로 러닝 개런티를 요구하면 난감할 수밖에 없다”며 “실제로 몇몇 스타들이 이런 무리한 계약을 요구해 섭외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제작사가 톱배우를 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단순한 티켓파워를 넘어 투자와 배급을 받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1100만 관객을 모으며 소위 ‘대박’을 터뜨린 <변호인>은 독립영화로 남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연출을 맡은 양우석 감독은 투자가 원활치 않으면 오랫동안 준비한 <변호인>을 저예산 영화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출연을 고사했던 송강호가 결국 <변호인>에 승선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지난해 이미 <설국열차>와 <관상>으로 1700만 관객을 모으며 확실한 흥행보증수표의 면모를 보여준 송강호가 합류하자 투자자들이 줄을 섰고 번듯한 상업영화로 탄생될 수 있었다.
2012년 초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부러진 화살> 역시 배우 안성기를 캐스팅하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려 나갔다.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15억 원. 이중 10억 원은 마케팅 및 P&A 비용으로 쓰였고 순수하게 영화를 제작하는 데는 고작 5억 원이 투입됐다.
정지영은 감독은 넉넉지 않은 제작비를 들고 <부러진 화살>의 제작에 착수하며 20년 전 <남부군>과 <하얀전쟁>으로 호흡을 맞췄던 안성기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 정지영 감독은 “사회적 이슈를 담은 영화 두 편을 함께 해 잘됐기 때문에 <부러진 화살>도 합작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는 것과 “제작비가 모자라 당장 출연료는 줄 수 없다”고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안성기는 시나리오를 읽은 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당초 정지영 감독은 몸값이 싼 무명 배우들에게 연기를 맡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안성기가 합류하면서 박원상 나영희 김지호를 비롯해 이경영 문성근 등이 특별출연 형식으로 참여했다. 이른바 ‘안성기 효과’였다.
반면 ‘의리 있다’고 한 배우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제작사도 있다. 이 제작사는 지금은 톱배우 대열에 합류한 A의 출세작을 만들었다. 당시 A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파격 캐스팅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이후 A는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기쁨에 찬 A는 이 제작사의 차기작에 “무조건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구두 계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A는 크랭크인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출연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또 다른 제작사와 출연 계약을 맺었다. 졸지에 주연 배우를 잃은 이 제작사는 부랴부랴 영화 출연 경험은 적지만 인지도가 높은 배우 B를 섭외에 촬영에 돌입했다.
B가 출연한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살짝 넘기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A가 선택한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A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한 영화 관계자는 “누가 봐도 A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A의 행동이 도덕적으로는 결코 정당화될 순 없다”며 “의리를 앞세운 구두 계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기억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