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노무현’의 만남 막아라!
안산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공식 합동분향소. 일요신문 DB
박 대통령이 참모들의 말처럼 ‘절대로 등 떠밀려 움직이지 않는’ 스타일이고, 특히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중시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전면적인 새판짜기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을 비롯해 박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핵심 측근들은 개각론이 제기될 때마다 “분위기 쇄신용 개각, 국면전환용 개각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해 왔었다. 박 대통령은 진작부터 교체 요구가 제기됐던 현오석 경제부총리,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등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이 일관되게 싸고돌았었다.
그랬던 박 대통령이 2기 정부를 고민하게 됐다는 것은 이번 참사로 인한 민심이반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과 희생자 유가족, 일반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는 박 대통령이 나서도 전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정 총리 사표 수리 방침 발표, 정부 합동분향소 조문, 국무회의를 통한 대국민 사과 등 박 대통령의 일련의 행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것처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실종자 가족 대기소가 차려진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나 합동분향소에 조문을 갔을 때 어김없이 ‘연출·조작 논란’이 불거진 것은 이런 신뢰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 여아를 위로하는 장면이 보도되자 “병원에서 안정을 취해야 할 어린이를 연출 사진을 찍기 위해 동원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여아의 친척이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연출·동원 의혹은 여전히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가시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합동분향소에서 위로한 할머니도 청와대가 섭외한 인물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청와대뿐 아니라 당사자인 할머니가 직접 사실 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실무자조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고 초기 엉터리 집계를 남발하고 심지어 해양경찰청은 세월호와의 교신 내용을 숨겼다가 뒤늦게 공개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며 “이런 잘못들 때문에 국민들에게 믿지 못할 정부로 낙인 찍히게 된 것 같다”고 토로했다. 무능력한 정부가 각종 의혹들에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한탄이었다.
지난해 5월 19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모문화제.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이런 냉랭한 여론은 청와대 관계자들을 잔뜩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한 관계자는 “내부 회의에서 이제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한 발언)는 없다는 얘기들이 많이 오가고 있다”고 전했다. 민심이 워낙 싸늘하기 때문에 ‘오프’를 요청하고 발언하더라도 기자들이 이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이른바 ‘라면에 계란’ 발언이 오프 요청과 상관없이 보도된 게 이런 판단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오프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매주 금요일이면 알게 모르게 전해졌던 대통령의 일정이 사전에 노출되지 않게 된 것도 청와대의 위기감을 반영한다. 한 출입기자는 “최근에는 오후 퇴근시간까지도 다음날 대통령의 일정이 발표되지 않는 게 다반사”라며 “심지어 4월 29일 합동분향소 조문 일정은 박 대통령이 분향소에 도착했을 즈음에야 기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현 상황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정권 위기상황”이라며 “이런 낯선 상황에 모두가 당황해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부, 심지어 여당인 새누리당에서까지 강력한 쇄신 요구와 압박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박 대통령을 근본적인 쇄신으로 내모는 요인이다. 새누리당 안팎에서는 소위 ‘6월 대위기설’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정부 규탄 분위기가 오는 5월 23일 고 노무현 대통령 5주기에 즈음한 추도 열기와 맞물리면서 새누리당이 6·4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그 결과로 박근혜 정부가 국정을 주도할 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선 “4월 16일을 사망일로 치면 지방선거 바로 전날인 6월 3일에 49재가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이번 지방선거가 세월호 참사 추모정국 속에 치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하는 새누리당으로서는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지도부의 한 인사조차 “내각이 총사퇴해도 성난 민심을 달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인데도 청와대 참모진들의 상황인식은 너무 안이하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정홍원 총리의 사퇴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데에는 새누리당의 역할이 있었다”며 “앞으로도 청와대가 주저한다 싶으면 여당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새누리당 의원은 “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한다면 박 대통령에게 그 부담이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며 “박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민심 수습을 위한 결단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