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5일 1백67억5백만원의 괴자금과 관련해 대검찰청에 출두하는 전재용씨. | ||
재용씨측 주장대로 2001년 9월 사망한 이규동씨가 지난 87년 외손자인 재용씨의 결혼식 때 ‘비밀리에’ 축의금으로 받았다는 18억7천만원을 ‘기묘한 재테크 수법’으로 ‘뻥튀기’해준 돈일까. 아니면 검찰의 지적대로 전두환씨의 비자금 저수지에서 흘러 들어온 ‘검은 돈’일까.
지난 2월 초 미국에서 전격 입국, 구속 수감된 재용씨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내 결혼식 축의금을 외할아버지가 재테크해서 불려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검찰은 “재용씨 괴자금 가운데 73억5천만원은 전두환씨의 비자금이 확실하며, 나머지도 전씨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4월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김문석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심 3차 공판에서 검찰은 재용씨 ‘괴자금’의 출처가 전두환씨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검찰 수사보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검찰이 이날 재판부에 넘긴 수사보고서는 다름 아닌 ‘전재용의 괴자금 관리인 리스트’. 검찰은 이 리스트를 언론 등에 공개하진 않았지만, 이번 사건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돼 귀추가 주목된다.
'검찰의 수사보고서’는 검찰이 지난해 말부터 재용씨 괴자금을 추적하면서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수사 기록을 A4용지 6∼7장으로 요약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재용씨가 2000년부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괴자금을 관리해왔는지, 그리고 누구를 통해 자금세탁을 했으며, 누구 명의로 위탁계좌를 개설했는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한마디로 재용씨의 괴자금이 흘러다닌 루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보고서인 셈이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던 재용씨 ‘측근’ 50여 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명단에는 재용씨 친구와 부하직원뿐 아니라 친·인척과 5공 시절 청와대 직원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해 명동의 유명 사채업자까지 검찰 수사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재용씨가 자신의 주변 인맥을 괴자금 관리인으로 총동원한 셈이다. 검찰은 이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비공개 소환 조사를 하고 계좌추적까지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 재용씨 괴자금 관리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은 바로 재용씨와 39세 동갑내기 친구이자 사업파트너였던 류아무개씨였다. 재용씨와 류씨는 지난 2000년 8월 설립된 의료기기 수입업체 ‘뮤앤바이오’(옛 파이오니어바이오텍) 시절부터 한 배를 탔던 사업 동반자. 그렇지만 사업자금의 대부분은 재용씨가 부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재용씨는 지난 2001년 1월 소프트개발공급업체인 ‘오알솔루션즈코리아’를 세웠는데, 지난해 8월부터는 류씨와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검찰 수사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재용씨의 ‘자금 관리인’으로 류씨가 지목됐다. 검찰은 여러 차례 걸쳐 류씨를 불러 조사했고, 그를 통해 재용씨의 괴자금이 사채시장에서 돈 세탁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검찰의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재용씨 부인 최정애씨가 대표이사를 맡았고 재용씨가 이사로 등재됐던 ‘제이앤더블유홀딩즈’(2000년 10월 설립) 시절, 류씨는 친구인 김아무개씨와 변아무개씨 등에게 부탁해 증권사 계좌를 개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재용씨가 자신의 돈을 숨기기 위해 위탁계좌를 만들었던 것. 물론 류씨도 자기 명의로 E증권사에서 계좌를 개설해 재용씨 자금을 관리하기도 했다.
또 재용씨의 부하직원으로 ‘심복’이나 마찬가지인 권아무개씨도 재산관리인 노릇을 했던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권씨는 재용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뮤앤바이오’와 ‘제이앤더블유홀딩즈’ 등의 이사로 등재돼 있었다. 특히 권씨는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톱 탤런트 박상아씨의 여동생이 사용했던 쏘나타 승용차를 자신의 아버지 명의로 등록해 놓은 것으로 <일요신문> 취재 결과 밝혀져 그 배경을 두고 의문을 낳았다. 그만큼 재용씨의 ‘사생활 관리인’으로도 권씨가 깊숙이 개입돼 있으나, 이번 괴자금 사건과는 별개의 문제여서 특별한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재용씨와 최근 몇 년 동안의 출입국기록이 동일했다는 까닭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미모의 여자 탤런트 P양’. 바로 박상아씨도 검찰 수사 대상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검찰은 박씨의 어머니와 여동생 계좌를 샅샅이 뒤졌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으로 재용씨의 돈이 얼마나 박씨와 그의 가족들 계좌로 입금됐는지는 대해선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검찰이 재용씨와 박씨가 얽힌 부분을 공개하지 않는 대신 재용씨와의 ‘협상용 카드’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즉 ‘전재용 괴자금=전두환 비자금’이라는 진술을 확보하기 위한 압박용 카드가 아니냐는 것.
▲ 지난 4월15일 투표하는 전두환씨 부부. 최근 검찰이 전씨 비자금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임준선 기자 | ||
손씨는 육사 33기로 79년 12·1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수행부관이었으며, 5공 시절 청와대 비서관과 제1부속실장 등을 지냈던 인물. 88년 전두환씨가 퇴임한 이후 지금까지도 연희동을 드나들어 ‘전두환의 심복’으로도 불리고 있다.
검찰은 재용씨가 ‘오알솔루션즈코리아’를 소유할 수 있었던 배경 못지않게 손씨가 이 회사를 인수할 수 있었던 자금의 출처에 강한 의구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손씨는 지난 97년 12월 자신의 소유로 돼 있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단독주택을 담보로 대출(근저당권 3억원)을 받은 뒤 현재까지 채무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인데, 무슨 돈이 있어 자본금 9억원에 달하는 재용씨 회사를 인수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은 손씨의 회사 인수 자금이 전두환씨의 비자금에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 할 만한 단서를 포착하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5공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장아무개씨와 경호실 직원이었던 조아무개씨, 이아무개씨 등도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특히 장씨는 87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 재무관을 지냈으며, 이후 전씨의 재산 관리인으로 있다가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그동안 재용씨 괴자금의 출처를 파악하기 위해 아내 최정애씨와 그의 오빠(재용씨의 처남)뿐 아니라 친형이자 출판사 ‘시공사’ 대표인 재국씨 등 친·인척 계좌에 대해서도 면밀한 조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재용씨 괴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는 “재용씨측은 이규동씨(재용씨 외할아버지)가 재용씨 축의금으로 채권을 매입한 후 만기 상환 받은 다음, 다른 채권을 재매입하는 수법으로 재테크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87년 재용씨 결혼식 때부터 2002년까지 아무리 그런 수법으로 재산을 부풀린다 해도 80억원을 넘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결국 재용씨가 아버지 전두환씨로부터 불법증여를 받지 않고서는 1백67억여원을 조성할 수 없다는 게 검찰측 주장이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재용씨의 외삼촌인 이창석씨(이순자씨의 남동생)는 “검찰에서 채권 금리를 단순금리로 계산했기 때문에 80억원밖에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복리금리로 계산하면 1백67억원이 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의문은 남아있다. 재용씨 외할버지가 고도의 재테크 수법으로 마련해준 ‘떳떳한 돈’이었다면 왜 굳이 재용씨가 사채업자까지 동원해서 자금세탁에 나섰느냐는 점이다.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재용씨는 친구이자 사업파트너인 류씨를 통해 명동의 유명 사채업자인 장아무개씨에게 자금세탁을 부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씨는 검찰에서 “류 사장으로부터 전재용 사장의 돈을 자금 세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재용씨측은 이래저래 궁지에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대검 중수부도 ‘불법 대선 및 정치자금 수사’를 조만간 매듭짓고, ‘전두환 비자금 사건’에 치중할 방침이어서 ‘연희동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