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5일 특별검사 사무소 개소식에서 기자회견하는 김진흥 특검(오른쪽). | ||
최근 김 특검팀이 핵심 수사 대상인 소위 ‘3대 의혹’에 대해 ‘실체가 없는 낭설’이라는 결론을 내놓으면서 일각에서 ‘부실 수사’ 논란과 함께 ‘특검 무용론’ 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검팀은 지난달 중순 이후 ‘썬앤문그룹 95억원 정치권 제공설’ ‘최도술씨 3백억원 모금 의혹’ ‘이원호씨 50억 현금 인출 및 양길승씨 금품 수수설’ 등 3대 의혹에 대해 잇따라 ‘사실무근’ 판정을 내렸다. 이 중 ‘썬앤문 의혹’은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인 문병욱 회장이 대선 직전 노 대통령측에 1억5천만원의 불법 자금을 건넨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것과 별개로 회사 부회장이던 김성래씨 등을 통해 95억원을 노 후보측에 전달했다는 의혹 등을 말한다.
또 최도술씨 관련 의혹은 대검 중수부 수사에서 SK에서 대선 직후 11억원을 받은 것을 포함해 30여 명에게서 17억원 가량을 받은 혐의가 드러난 최씨가 대선 자금과 당선축하금 명목으로 부산지역 기업인들에게서 3백억원을 모금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원호씨 등 관련 의혹은 청주지역 나이트클럽 소유주인 이씨가 노 대통령측에 50억원을 건넸으며, 자신에 대한 수사를 무마하기 위해 양길승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게 4억9천만원을 전달했다는 의혹이다.
그런데 김 특검은 지난달 24일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썬앤문 95억원설’은 일찌감치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최도술씨 3백억원 수수설은 3백억원의 출처조차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또한 김도훈 전 검사가 제기한 수사외압 의혹을 비롯해 이원호씨와 양길승씨 관련 의혹 역시 ‘소문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시쳇말로 모두 ‘꽝’이라는 얘기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여론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권은 “특검팀의 수사 의지가 부족해 제대로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며 특검팀을 성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 우호적인 대한변호사협회의 추천을 받은 김 특검팀의 ‘태생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17일 썬앤문그룹 관련 의혹을 수사해온 이우승 특검보가 검찰에서 파견된 김광준 검사와의 갈등 끝에 전격 사퇴한 사건은 이런 기류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당장 민주당은 “특검이 과거에 비해 수사가 부진한 데다 사퇴한 이 특검보 주장에 따르면 수사방해가 있었다고 한다”며 “수사의지가 없는 김진흥 특검의 교체요구를 검토하겠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나라당도 검찰과 특검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에 반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등 여권은 “야당이 정치공세용으로 근거 없이 온갖 의혹을 제기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며 홀가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특검 수사에 따른 부담 때문에 열린우리당 입당 시기를 늦추는 등 운신의 폭이 협소했던 노 대통령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있다.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노 대통령이 특검팀의 수사가 끝나는 4월5일 이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는 것은 너무 촉박하다”며 “대통령은 이달 말쯤 (열린우리당에) 입당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이처럼 어떤 수사결과를 내놓든지 정치적 해석이 따라붙는 데 대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 특검팀은 상당수 국민들이 이전 네 차례의 특검을 거치면서 “특검을 하면 검찰이 못밝힌 진상이 꼭 드러난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 것에 몹시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의 부실수사 의혹에서 출범한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와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의 동생 승환씨,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 등 권력 실세들의 비리 혐의를 줄줄이 잡아내 사법처리하는 성과를 올렸다.
▲ 지난 5일로 60일간의 1차 수사기한이 만료된 특검팀은 30일간의 수사연장을 결정했다. 사진은 김진흥 특검사무소 안내판. | ||
이에 대해 김 특검팀은 “이전 특검과 달리 이번 특검은 검찰이 명운을 걸고 수사한 사건을 뒤늦게 떠맡아 출발선이 다르다”며 억울해하는 분위기다.
양승천 특검보는 “저인망에서 빠져나간 고기를 잡겠다고 주변 바다를 다 뒤지는 격”이라는 말로 고충을 토로했다. 이준범 특검보도 이원호·양길승씨 관련 의혹이 사실과 다르다는 취지의 설명을 하면서 “국민들이나 기자들이 뭔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지만 이 의혹은 ‘상상임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들 홈런만 신경쓰지 ‘스트라이크 아웃 잡아내는 것’(의혹을 사실무근으로 밝혀내는 것)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며 뼈있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어쨌든 특검팀은 지난 5일로 60일간의 1차 수사 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30일간의 수사 연장을 결정하고, 남은 의혹들의 실체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 10일간은 수사기록 정리 등에 소요될 것을 감안하면 실제 수사기간은 이달 25일까지 보름 정도 남은 셈이다.
현재 특검팀이 최대 승부처로 삼고 있는 분야는 썬앤문그룹의 감세청탁 의혹이다. 본류인 ‘95억원 제공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낸 상태나, 감세청탁 부분은 노 대통령의 연루 여부 등이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특검팀은 얼마 전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노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씨에게 감세청탁을 하면서 수백만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지금까지 문 회장과 안씨는 모두 금품수수는 물론, 감세청탁을 하거나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이에 따라 특검팀은 안씨가 감세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뒤 노 대통령에게 관련 부탁을 했는지를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일 태세다.
사실 이 감세청탁 부분은 특검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 특검팀의 수사 범위를 넘는 것이라는 논란이 일고 있으나, ‘실적’에 목말라하고 있는 특검팀은 일단 ‘못먹어도 고(GO)’하기로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손영래 전 국세청장이 썬앤문그룹에 부과될 세금을 1백71억원에서 23억원으로 깎아주는 과정에 노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의 진실 규명도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특검 주변에서는 “결국 이번 수사의 하이라이트는 썬앤문 의혹과 관련해 특검팀이 노 대통령을 상대로 직접 조사하는 상황이 벌어질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수사 사안은 최도술씨의 노 후보 경선자금 수수 혐의와 관련된 것이다. 특검팀은 수사 착수 이후 최씨가 청와대 재직 중 기업체들로부터 1억2천여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낸 데 이어 2002년 3~4월 차아무개씨 명의의 차명계좌로 당시 노 후보의 경선자금 1억여원을 수수한 단서를 새로 찾아냈다.
특검팀은 “경선자금은 특검법상 수사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이어서 수사는 검찰로 넘어갈 전망인데, 이 경우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는 노 후보측 경선자금 수사에 중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특검팀이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검법이 정한 핵심 수사 대상은 모두 ‘허구’로 드러난 만큼, 차제에 걸핏하면 ‘특검 수사’를 부르짖는 정치권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번 특검팀 예산이 2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국회의원들이 시중에서 들은 풍설을 규명하기 위해 국민의 귀중한 혈세를 마구 써도 되는 것이냐”면서 “검찰이 수사한 사안이나, 수사 근거가 박약한 ‘카더라’성 의혹 등은 아예 특검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금실 법무장관은 지난 4일 부산고·지검을 초도 순시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특검은 정치권에서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 앞으로는 사실이나 혐의에 기초해서 법을 만들고 더욱 신중하게 수사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4월 총선 이후에 꾸려질 17대 국회에서는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무조건 의혹을 제기한 뒤 특검에 진상규명 책임을 지우는 ‘묻지마식’ 특검 띄우기 관행이 사라질지 두고 볼 일이다.
이진기 언론인